▒ 소시지가 키운 테너 Max Lorenz (막스 로렌즈)
막스 로렌즈는 20세기 후반 독일의 위대한 바그너 테너였다. 그의 대표적인 역할은 트리스탄, 지그프리트, 그리고 발터(탄호이저)였다. 이밖에도 그는 플로레스탄(휘델리오), 오텔로, 바커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리아드네) 등에서도 특출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베를린의 도이치오퍼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바이로이트, 잘츠부르크,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그랑디 테노리(Grandi Tenori)로서 스테이지를 압도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바그너, 베르디 이외에도 새로운 작품의 이미지 창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면 아이넴(Einem)의 Der Prozess (1953), 리버만(Liebermann)의 Penelope (1954), 바그너-레게니(Wagner-Regeny)의 Das Bergwerk zu Falun (1961) 등의 초연에서 주역을 맡는 기록을 남겼다.
특이하게도 막스 로렌즈에 대하여는 청중들과 평론가들의 의견이 완연하게 다르다. 독일에서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틱 테너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음성, 음악적 테크닉, 스타일, 감정표현이 신통치 않다는 평을 받았다. ‘장엄한 전통, 노래의 70년’이라는 책을 쓴 존 스틴(John Steane)은 로렌즈의 음성에 대하여 매력은커녕 추하다고 악평을 하였다. ‘메트로오페라 스토리’라는 저서를 남긴 어빙 코로딘(Irving Kolodin)은 로렌즈를 그랜드 오페라 아티스트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딱딱하여 유쾌하지 않다는 식의 글을 남겼다. 한편, 독일의 일반적인 평론가들은 그의 음성에 강력한 찬란함이 있으며 구절법(프레이싱)이 분명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에도 벨칸토의 기본을 유지하는 탁월함이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또 다른 평론가는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은 힘있게 빛났다. 부르기에 어려운 슈톨칭(Stolzing)의 고음도 매력적인 고귀함으로 마스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로렌즈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달랐다. 로렌즈는 모든 악평에도 불구하고 1933년부터 10년 이상을 바이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바그너 테너였다. 그는 1937년 런던에서 있었던 영국왕 대관식에 초청을 받아 축가를 불렀으며 1950년 라 스칼라에서의 ‘신들의 황혼’에서는 푸르트뱅글러의 주장에 따라 지그프리트로 선택되어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지그프리트
막스 로렌즈는 1901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푸줏간(정육점) 주인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막스 쥘첸푸쓰(Sülzenfuss)였다. 1963년 발간된 로렌즈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아들 막스가 가업을 이어받아 푸줏간을 운영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막스는 성악을 하겠다고 고집하였다. 아버지는 음악공부는 돈만 낭비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아버지는 막스가 오페라 구경을 가는 것도 금지했다. 물론 막스는 아버지 몰래 오페라 구경을 다녔다. 가게에서 소시지를 슬쩍하여 오페라 입장권과 바꾸었다. 물론 가끔씩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호되게 채찍을 맞기도 했다. 막스는 아버지의 ‘성악가 결사반대’ 주장에 반항하는 의미에서 그의 성(姓)을 쥘첸푸쓰에서 로렌즈로 바꾸었다. 쥘젠푸쓰라는 단어의 뜻은 돼지발굽을 말한다. 푸줏간 주인에게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로렌즈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음악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악 수업은 평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음악교수는 그의 소리가 너무나 볼품없고 거칠다고 하여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로렌즈는 자서전에서 ‘내가 성악을 하겠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핀잔을 주었다. 목소리가 무척 거친 사람이 노래는 무슨 노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목소리가 거칠면 거칠수록 노래는 더 잘 부를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로렌즈는 담당 교수 몰래 성악공부를 하였고 나중에는 뒤셀도르프에서 40Km 떨어진 쾰른에 1주일에 세번씩 가서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 몰래 그렇게 레슨을 받기를 5년이나 계속하였다.
쾰른에서 파울리(Pauli) 교수에게 레슨을 받은후 그는 파울리 교수의 권고에 따라 베를린에 가서 그렌체바흐(Grenzebach)교수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그렌체바흐는 이미 멜키오르와 키프니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베를린은 뒤셀도르프로부터 40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쾰른처럼 몰래 다니면서 공부할수 없었다. 베를린 사건을 안 아버지는 대노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막스의 편을 들고 나서서 ‘결사지지’하였기 때문에 겨우 집에서 뛰쳐 나올수 있었다. 베를린에 간 로렌즈는 그렌체바흐 교수를 찾아갔다. 마침 레슨실에서는 로릿츠 멜키오르가 레슨을 받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나중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일 영웅테너(Heldentenor)가 되었다. 로렌즈는 그렌체바흐 교수가 멜키오르를 가르치는 장면을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렌체바흐 교수는 멜키오르의 음역과 음색, 음질에 적합한 발성과 표현을 가르쳤다. 로렌즈를 대한 그렌체바흐 교수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녹슨 때는 모두 벗겨 버리자’라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렌체바흐 교수는 대단히 준엄한 사람이었다. 로렌즈는 역도 선수처럼 체격이 좋고 건장하여서 마치 자신감을 보이기나 하듯 있는 힘을 다해 발성하기가 일수였다. 그럴때 마다 그렌체바흐 교수는 ‘안돼! 연습할 때에는 피아노(여린 소리)부터 시작해야 해! 나는 네가 포르테(강한 소리)로 노래 부를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소리는 피아노로부터 자라나는 것이야. 작은 소리, 낮은 소리로 노래 부르는 것부터 배워야해. 그래서 네가 노래 부를 때에는 청중들이 네가 옷깃을 스치는 소리까지 들을수 있도록 되어야 해. 목소리는 고무줄과 같은 것이야. 잡아당기면 길어지게 마련이야!’라고 주의를 주었다. 나중에 로렌즈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원래 나는 리릭테너였으나 그렌체바흐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헬덴테너가 될수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로렌즈는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그는 하루도 빼지 않고 그렌체바흐 교수를 찾아갔다. 어느 학생보다도 제일 먼저 와서 제일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레슨 차례가 아니면 레슨실의 한 구석에 앉아서 다른 학생들의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스스로 공부했다. 그렌체바흐 교수는 로렌즈에게 아리아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1년 내내 단 한 곡을 가지고 아르페지오와 프레이싱을 거듭하였을 뿐이었다. 과연, 1년후 그렌체바흐 교수는 이 유망한 제자 로렌즈를 자기의 의도대로 완전히 콘트롤할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렌체바흐 교수는 로렌즈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는 로렌즈에게 일찍 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간혹 밤 10시쯤 로렌즈가 집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지를 체크하기도 했다. 나중에 로렌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아서 아침에 약간 부수수한 모습으로 교수님을 찾아가면 교수님은 두말하지 않으시고 나를 당장 쫓아내셨다. 그런 정신 상태로는 레슨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씀이셨다. 물론 나에게는 돌봐야 할 애가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교수님께서 만일 진정으로 성악가가 되고 싶으면 자기를 희생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교수님의 기본 가르침이었다.’
그렌체바흐 교수로부터 레슨을 받은지 2년후, 그렌체바흐 교수는 그제서야 로렌즈에게 어떤 잡지사가 주관하는 아마추어 성악경연대회에 나가도록 허락했다. 로렌즈가 25세 되던 해인 1926년이었다. 경연대회의 오케스트라 협연은 베를린 필하모니였다. 나중에 로렌즈는 어떤 아리아를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무나 긴장을 해서였다. 로렌즈는 긴장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웃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로렌즈에게 연습코치(Répétiteur라고 함)는 실없이 웃으면 평가가 나빠질수도 있으니 제발 웃지 말라고 자꾸 경고를 주었다. 아무튼 다음날 아침, 로렌즈는 전보 한통을 받았다. 70명 출전자 중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통보였다. 당장 그날 오후 드레스덴 오페라가 로렌즈에게 계약을 제시하였다. 몇주일후 로렌스의 사진이 그 성악경연대회를 주관하였던 잡지사의 잡지 표지에 실렸다. 로렌즈는 그 잡지를 집으로 보냈다. 로렌즈의 아버지는 그 사진을 정육점연합회 보내어 화보에 싣도록 요청하고는 ‘우리 아들이 드레스덴 슈타츠오퍼의 헬덴테너가 되었다’면서 무척 기뻐하였다.
물론 로렌즈가 드레스덴에서 바그너의 헬덴테너 주역으로 즉각 기용된 것은 아니었다. 상당기간동안 하찮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예를 들면 로리칭(Lortzing)의 운디네(Undine)에서 단역을 맡는 것 등이었다. 어느때 탄호이저 리허설에서는 객석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음악감독이 로렌즈를 보고 ‘어이, 거기 저 형편없는 테너! 그렇게 노래 부르려면 집으로 가소! 당신처럼 재주가 메주인 사람은 드레스덴에 아니라 마이쎈(Meissen)에나 가야할거야!’라고 소리쳤다. 마이쎈은 드레스덴 부근의 작은 마을로서 여기에도 오페라극장이 있지만 이른바 삼류들이나 겨우 자리를 얻어 출연할 정도였다. 더구나 당시 드레스덴에는 파울 쇠플러(Paul Schöffler), 엘리자베트 레트버크(Elisabeth Rethberg)와 같은 우상적인 존재들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로렌즈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섰지만 당시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로렌즈는 특히 크로아티아 출신의 테너 티노 파티에라(Tino Pattiera)로부터 그의 역할은 모두 배웠다. 운명의 힘, 투란도트, 마농 레스코...그리고 바그너의 테너 역할들이었다. 당시에는 주역에게 대역들이 있었다. 막스 로렌즈는 1975년, 64세를 일기로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레코딩은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로 남아있다. 그의 레코딩중에서 지그프리트의 노퉁(Nothung)은 가장 뛰어난 아리아이다.
'디바·디보의 세계 > 세계의 명테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의 축복 Miguel Fleta (미구엘 플레타) (0) | 2008.03.02 |
---|---|
완벽한 벨칸토 Michael Colvin (마이클 콜빈) (0) | 2008.03.02 |
런던의 대기만성 Mark Padmore (마크 패드모어) (0) | 2008.03.02 |
제2의 카루소 Mario Lanza (마리오 란자) (0) | 2008.03.02 |
황금의 음성 Mario Filippeschi (마리오 필리페스키) (0) | 2008.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