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더할수 없는 완벽함 Neil Shicoff (닐 쉬코프)

정준극 2008. 3.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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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할수 없는 완벽함 Neil Shicoff (닐 쉬코프)

 


닐 쉬코프는 1949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리톤으로서 유태회당 성가지휘자로서 유명하였다. 쉬코프의 할아버지 역시 유태교 회당 솔리스트였다. 그 아버지와 그 아들, 즉 쉬코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두 사람이 함께 유태인 결혼식과 종교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쉬코프의 증조할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 가까운 폴란드 마을  출신으로 빵굽는 일을 했지만 역시 성악가였다. 쉬코프의 할아버지는 새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와서 뉴욕의 브루클린에 정착하고 살았다. 젊은 쉬코프 역시 유태 회당의 솔리스트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쉬코프는 1950년대에 뉴욕 라이도 방송인 WEVD의 유태인을 위한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오래동한 하였고 유태인의 삶을 그린 영화 콜 니드라이(Kol Nidrei)에도 출연하였다.


쉬코프가 대중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것은 여덟살때에 유태 회당에서의 어느 결혼식에서였다. 이 날 그의 음성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신랑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했다고 한다. 어린 쉬코프는 회당에서 노래를 한번 부를 때마다 5불을 사례금으로 받았다. 어린 쉬코프에게 5불은 당시로서 거금이었다. 그러나 쉬코프는 5불씩 받는 이득을 뿌리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면 원인모를 갑작스런 공포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무대 공포증이었다. 이 증세는 나중에 쉬코프의 무대생활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의 첫 성악교사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아버지의 성악선생을 찾아가 그로부터 성악레슨을 받았다.

 

바이런 경


그는 18세 때에 줄리아드의 오디션에 응모하여 ‘여자의 마음’(La donna é mobile)를 불렀다. 그는 이 아리아를 반음 낮게 불렀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의 고음은 엄청난 B플랫으로 부를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대단한 음성에 ‘와-’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오디션에는 불합격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아직도 어린 나이에 베르디를 그런 식으로 부르다가는 전문 테너가 되기도 전에 목소리가 갈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실망한 그는 히브리연합대학에 들어가 유태 회당 솔리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몇 년동안 유태회당에서 솔리스트로 봉사했지만 결국 자기가 갈 길은 오페라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히브리연합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줄리아드에 도전하였다. 이번에는 21세의 쉬코프에게 합격을 통지했을뿐만 아니라 제니 투렐(Jennie Tourel)장학금까지 받도록 해주었다. 1년후 그는 아메리칸오페라센터에서 팔리아치의 작은 역할을 맡아 처음으로 무대에 섰고 이어 1972년 버질 톰슨의 오페라 ‘바이런 경’(Lord Byron)의 세계초연에서 주역을 맡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유태 여인에서


쉬코프는 실로 줄리아드 재학중에 그의 뛰어난 음성으로 이미 모든 사람들로부터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의 음성은 풍부하고 열의에 넘쳐있으며 정열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관중들과 노래로서 대화하려는 진지함이 돋보이는 테너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음성은 종소리가 널리 울리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음성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라는 예기를 들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음성은 성숙해지고 깊이가 있게 되었다.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평온하며 인간의 내면성을 심도있게 보여주는 것으로 변모되어갔다. 그리하여 이미 19세 때에 뉴욕시의 아마토(Amato)오페라에서 돈 호세를 맡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1978년 쉬코프는 줄리아드 학생인 리릭 소프나로 쥬디트 해든(Judith Haddon)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한지 5년후 알리자 다니엘르(Aliza Danielle)를 양녀로 입양하였다. 결혼후부터 거의 6년 동안은 쉬코프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84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쉬코프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쉬코프의 완벽주의는 단연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2년동안의 모든 공연계획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그의 성격은 낙담적일 경우가 많았다. 마치 인생무상을 깨달은 사람같았다. 이러한 성격의 변화는 노래부르는 테크닉에도 어려움을 주었다. 그는 공연할 때 무대에서 왜그런지 초조하고 불안한 감을 던져 주었다. 쉬코프는 공연을 자주 취소하였다. 결국 1980년대말에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평을 받으며 무대를 떠나야 했다. 쉬코프의 비탄과 낙담은 그의 이혼으로 직결되었다. 그의 이혼 분쟁은 세계 오페라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자기의 보호자였고 인도자였던 어머니의 급작스런 서거, 아내 쥬디트와의 이혼, 그리고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딸과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런것들이 복합되어 그는 고립되었고 자포자기가 되었다. 당시 어떤 신문은 쉬코프가 술주정뱅이가 되었다고 보도한 일이 있지만 쉬코프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부인하였다. 1989년 그는 메트로에서 베르테르를 맡아 공연한 일이 있다. 그러나 무대에서 샬로테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는 장면에서 그는 갑자기 자기의 불운한 이혼이 났었던지 약간의 정신적인 분열 증세를 일으켰다. 쉬코프는 버림받았다든지 또는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가장 효과를 본 치료는 영화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을 자주 본것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연주자로서 성공하려는 신념을 되찾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낙심을 과감히 버리게 되었다.

 

유진 오네긴에서


1991년 그는 메트로에서 파우스트로서 미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가진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메트로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오페라극장은 쉬코프에게 계속적으로 출연요청을 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사실 그의 미국도피는 부인인 해든과의 이혼수속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든은 정신적으로 쉬코를 무던히도 괴롭혔으며 (변호사를 통해 온갖 위협을 다했다고 함) 더구나 도저히 감당할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위자료를 요청하였다. 베를린에서 3년을 지낸 그는 취리히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7년동안 지내면서 스위스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스타로서 찬사를 받게 되었다. 1997년, 마침내 거의 10년이란 세월을 끌었던 이혼 소송은 해결되었다. 법원의 이혼판결로 쉬코프는 약혼녀인 레게로 소프라노 돈 코토스키(Dawn Kotosli)와 결혼할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3년에 이미 아들 알렉산더가 있었다. 쉬코프와 던은 1988년부터 같은 성생 밑에서 레슨을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으며 결국 절대로 헤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쉬코프가 해든과의 이혼소송에 지쳐서 유럽에 도피하고 있는 기간동안 던은 쉬코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정신적인 위로자이며 지원자로서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던은 쉬코프의 정신적 및 감정적 포구이며 동반자였다. 쉬코프와 던, 그리고 아들 알렉산더는 현재 비엔나에 살고 있다. 쉬코프는 무대활동은 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다른 취미생활로 새인생을 엔조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