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580-1610) 시조 오페라의 출현: 몬테의 신들과 인간들의 이야기

정준극 2008. 3. 4. 17:00

(1580-1610) 시조 오페라의 출현: 몬테의 신들과 인간들의 이야기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589: 프랑스에서 식사할 때 포크(Fork)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식사예절이라는 것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식사에티켓이 발달하자 우아하게 식사하면서 음악을 듣는 관습도 시작되었다. 남들은 재잘거리면서 우아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음악가들은 이들의 소화를 돕기 위해 밥도 못먹고 연주를 해야 했다.

1596: 영국 리치몬드에 있는 여왕궁전에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었다. 존 해링튼(John Harrington)경이 개발하였다. 대단한 개발이었다. 플로토우(Flotow)의 오페라 마르타(Martha)의 무대가 리치몬드인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1597: 역사상 최초의 오페라라고 주장할수 있는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오페라 다프네(Daphne)가 공연되었다. 대본과 연출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음악은 분실되었다. 연출 노트에 의하면 음악극인 다프네에는 크고 무시무시한 뱀이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 뱀이 몸을 흔들고 날개를 퍼덕이며 입으로는 불을 뿜도록 기계장치를 했다고 한다.

1600: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야코포 페리와 줄리오 카치리(Giulio Cacciri)가 공동으로 쓴 유리디디체(Eurydice)였다. 플로렌스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시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일부에서는 유리디체가 본격 오페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콘티누오(continuo)가 음악 연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루트, 하프, 현악기등은 멜로디만 연주했으나 이들 악기가 저음부분의 반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음악 형태에 있어서 대단한 진전이었다. 콘티누오는 화성은 변하지만 저음은 일정한 연주양식을 말한다.

1604: 런던에서는 왕실교회에서의 예배때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왕실로부터 사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직업 음악인의 시작이었다.

1606: 로마에서 처음으로 야외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그로부터 고대 경기장이나 야외극장에서 알 프레스코(Al fresco: 노천)로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1607: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공연되었다. 오늘날에도 공연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이다. 이후 베니스 스타일의 오페라가 17세기 말까지 유행하였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의 무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결혼 축하


1560년대쯤 해서 플로렌스에서는 이 도시의 우수 지식인 및 자칭 개혁적 예술가들이 심심하면 주점이나 개인집에 모여 예술을 논하고 사상적 개혁을 토론하는 일이 거의 유행처럼 되었다. 플로렌스 카메라타(Camerata)의 전신이었다. 이들은 특정주제를 정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예술과 인생의 의미, 우주, 기타 등등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어느날 누가 ‘아니, 글쎄 말이야! 연극도 좀 달라져야 하는거 아냐?’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모두들 음악을 겸한 연극에 대하여 심각하게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발레도 좋은데!’라고 말했다가 눈총을 받기도 했다. 발레까지 연극에 넣기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에서였다. 선배 카메라타 동호인들의 일관된 생각은 고대 그리스 드라마의 이상과 원칙을 재현하되 음악 좀 살리자는 것이었다.

 

플로렌스 카메라타의 연주

                    

이들이 아무리 획기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도 누군가가 앞장서서 이끌어가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연극에 음악을 가미한 과거의 단순한 원시 뮤지컬을 발전시켜 살아 있는 찬란한 음악 드라마를 완성해야 할 선구자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지경에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가 등장하였다. 오페라의 시조할아버지 쯤 되는 사람이다. 베르디는 알겠는데 몬테베르디는 누구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사족: 베르디(Verdi)라는 단어는 그린(Green)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몬테베르디의 의미는 우리식으로 청산(靑山: 푸른 산)이다. 그건 그렇고 음악을 중심으로한 연극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토론이 있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형태의 연극은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그것도 작품이라고 할수 있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당신 무슨 말 하는거야? 작품이다.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작품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Opus라고 한다. 작품이 여러 편이면 Opera라고 부른다. 아무튼 그로부터 음악을 곁들인 연극을 오페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에서 음악뿐만이 아니라 무대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는 무대, 기계장치를 이용한 배경, 역동감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1600년대 초반, 몬테베르디가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할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스펙터클했다. 오페라를 보다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기상천외의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주인공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올라가는 장치를 만들었고 무대 배경도 수시로 회전하여 변화를 주도록 했으며 연기나 불을 피워 화산 장면을 만들어 내는 등의 특수 연출도 사양하지 않았다. 무대 장치의 그림도 되도록이면 화려한 색을 사용했다. 음악은 둘째 치고, 무대만 보고서도 압도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에서 샹들리에가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고 감탄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17세기 초에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의 기본 장치에 불과했다.

 

장 바티스트 륄리의 '아티스'의 한 장면


오페라는 특수층의 전유물?

초기 오페라가 왕족이나 귀족들의 전유물로서 출범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오페라의 스토리는 영웅담과 신화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공연장의 분위기도 엄숙 그 자체였다. 오페라 관람자들은 대부분 지체 높은 귀족 및 부호들이었다. 지체 높은 나리들께서 오페라 공연중에 박수를 치거나 브라보를 외치는 일은 쪽팔리는 민망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공연의 막간, 즉 휴식시간 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오페라를 관람하던 귀족들은 휴식시간에 휴게실에 나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샴페인 잔을 기울이는 것에 더 재미를 갖게 되었다. 공연 시간이 길 경우에는 휴게실에 뷔페를 차려 놓고 배를 채우기까지 했다. 아무리 왕족, 귀족, 부호라고 해도 배고픈 데에는 장사가 없지 않던가? 휴게시간은 사교의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유럽의 대부분 오페라극장에서는 휴게시간에 샴페인, 케이크 등 요기할 것을 판다. 그리고 유럽의 대부분 오페라극장은 휴게실이 잘 꾸며져 있다.

 

파리 오페라의 화려한 회랑


사실 지체 높은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는 음음 거리거나 악악 거리는 아리아, 쾅쾅 거리는 오케스트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용수들, 게다가 알아듣기 힘든 대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은 은근한 고역이었다. 더구나 사람이란 지체가 높을수록 돌대가리인 경우가 많으므로 만약 공연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갔다 오면 이들 석두로서는 전체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추적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스토리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에게는 그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휴식 시간이 가장 기다려지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보석으로 한껏 치장한 귀부인들이 부채를 살랑거리면서 조잘대는 모습, 망원경을 눈에 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사교계의 여인들에게 무거운 ‘오페라 세리아’의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오페라를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교를 위해 왔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오페라 극장이 말굽 형태로 건축된 것도 저 건너편에 앉아있는 상대방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에서였다.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오디토리움과 무대. 대개의 극장 형태는 말굽 형태이다. 서로 상대방을 바라볼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오페라 극장은 점점 더 사교적 모임의 장으로 변해갔다. 상류층 자제들의 중매 장소로 최적이었고 고관대작에게 잘 보여 출세의 길을 잡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한다하는 남녀들이 탐욕스런 눈빛으로 마주 쳐다보다가 이윽고 밀회를 약속하는 것도 오페라의 휴게시간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파리의 오페라 코믹 극장이었다. 이곳은 완전히 고급 마담뚜들의 출근 장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심각한 내용의 오페라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내용의 오페라를 원하게 되었다. 물론 어차피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의 그들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페라가 첫째 심각하지 않을것, 둘째 스토리가 간단할 것이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오페라 작곡가들은 후원자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스토리가 재미난 오페라 부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의 한 장면. 산 카를로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