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1740) 거지에게 쫒긴 헨델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740: ‘지배하라! 영국인이여!’(Rule, Britannia!)라는 노래가 토마스 아르느(Thomas Arne)의 마스크의 주제 음악으로 사랑받았다. 나중에 이 주제는 헨델, 베토벤, 바그너가 이용하였다. 되풀이되지만 마스크는 영국의 궁정에서 유행했던 공연 형태로 대화체와 노래가 복합된 오페라였다. 마스크라는 용어는 관객들이 마스크를 쓰고 오페라 공연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1749: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조곡이 런던의 그랜드 파크에서 실제로 불꽃놀이와 함께 화려하게 연주되었다.
헨델의 등장으로 런던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는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의 원장이 되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보급에 열중하였다. 헨델 전성시대였다. 무엇이든지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한다. 어느 때부터인지 헨델의 오페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왜 그런지 사람들, 특히 그를 후원하던 왕족들과 귀족들이 헨델을 찾지 않게 되었다. 헨델은 판촉을 위해 오페라에 코미디 요소를 첨가해 보기로 했다. 오페라 포로(Poro: 1731)는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했지만 다음해에 내놓은 에지오(Ezio)는 재난이었다. 그 다음에 내놓은 소사르메(Sosarme)는 극장장이 관중들을 생각해서 레시타티브를 삭제하도록 강요할 정도였다. 런던 사람들은 보고나면 허무한 코미디보다는 기억에 남을 기막힌 아리아를 원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그런 추세로 가고 있었다. 헨델은 그런 스타일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연속해서 몇편 선보였다. 올란도(Orland), 크레타의 아리안나(Arianna in Creta), 세르세(Serse: Xerxes), 이모네오(Imoneo)등이었다.
존 게이+요한 페푸슈의 '거지 오페라'의 무대 스케치
그런데도 사람들이 찾아와 주지 않았다.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변덕이 심한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보통생활과는 관계없는 신들의 작태에 싫증을 느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똑같이 들리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헨델 음악에 돈내기가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 때에 헨델의 오페라단에 경쟁자가 나타났다. 대영제국의 황태자(Prince of Wales)가 지원하는 ‘귀족 오페라단’이었다. 헨델과 비슷한 내용의 오페라이면서도 자기들이 후원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귀족들은 그쪽 공연으로 몰려갔다. 헨델의 오케스트라는 해단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작심한 헨델은 대신 오라토리오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영국 특유의 오라토리오가 탄생하는 계기였다. 메시아(The Messiah)가 대표적이었다. 화려하고 독창적이었다. 제임스국왕이 메시아를 관람하였을 때 할렐루야 합창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일화는 오늘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그로부터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할렐루야가 불러질 때에는 모두들 기립하여 경의를 표하는 전통이 생겼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즈음에 존 게이(John Gay)의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등장했다. 발라드 오페라의 개막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발라드 오페라의 특징은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아는 대중 노래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라드 오페라의 내용은 도덕적인 것이었다. 근친상간이나 무자비한 보복이 판치는 신화적 내용에 비하면 매우 건전한 내용이었다. 발라드 오페라는 런던의 오페라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헨델의 '아리오단테'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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