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700-1750) 이상향 아르카디아: 메타스타시오의 무대

정준극 2008. 3. 5. 08:59

(1700-1750) 이상향 아르카디아: 메타스타시오의 무대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705: 이탈리아의 위대한 카스트라토인 카를로 브로스키 화리넬리(Carlo Broschi Farnelli)가 태어났다. 화리넬리가 노래 부를때면 기절하여 쓰러지는 여자 팬들이 수두룩했다. 우울한 성격때문에 힘들어하던 스페인의 필립5세는 화르넬리에게 1년에 5만 프랑을 주기로 하고 매일 저녁 4곡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계약했다. 화르넬리는 그후 25년간 똑 같은 노래 4곡을 필립5세를 위해 불렀다.

1709: 이탈리아의 하프시코드 제작자로 유명한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Francesco Cristofori)가 현대적 피아노를 처음 개발하고 gravicembali col piana e fort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740: 8세의 프란츠 요셉 하이든이 비엔나의 성슈테판성당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세때에 소리에 이상이 생겨 합창단원을 그만둔 후에는 상당기간 가난한 생활을 했다.


알레산드로 스칼라티


영국에서 헨델 등에 의한 이탈리아 오페라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계속 활개를 치고 있었다. 17세기말 로마오페라 군단의 사령관은 알렛싼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였다. 그는 몇가지 획기적인 기법을 오페라 작곡에 도입하였다. 아리아를 다 카포(Da Capo) 형태로 만든 것은 최대의 성과였다. 현악기들도 단순한 콘티누오(continuo: 하모니는 변하지만 저음은 변하지 않는 연주 방식) 역할에서 벗어나 아리아와 동등한 역할을 하도록 했다. 오페라의 서곡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스칼라티의 서곡 스타일은 빠르게-천천히-빠르게였다. 후세 작곡가들이 스칼라티의 스타일을 3악장 교향곡에 반영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대본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

                      

몬테베르디 이후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점점 더 컬러풀하게 변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교황성하께서 즐겨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기는 것 금지, 근친상간 등 극단적인 스토리 금지, 과다한 무대장치의 금지 등이 골자였다. 그러자 오페라 세리아에 대한 발전적인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스토리는 되는 대로의 내용으로 하면 안되며 누구나 공감하는 정상적인 내용이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에 기본을 둔 것이면 우선 합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본가의 역할은 중요했다.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대본가는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였다. 그의 대본은 상식과 이성에 기본을 둔 것이었으며 인간의 삶을 존엄한 것으로 부각시킨 것이었다. 보수적이기 때문에 너무 따분하다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메타스타시오의 스토리는 권선징악, 해피엔딩에 기본을 둔 것이었다. 그 누가 그런 내용을 혐오스럽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옛 그리스 산속의 이상향 아르카디아(Arcadia)에서 머무는 듯 했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대표적인 오페라는 ‘버림받은 디도네’(Didone abbandonata)였다.


'버림받은 디도네'의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