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1814)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휘델리오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04: 나폴레옹이 파리에서 교황 비오7세가 참석한 가운데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러시아 민족 오페라의 아버지인 미하일 글링카가 러시아의 노보스파쓰코예에서 태어났다.
1805: 베토벤의 휘델리오가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다.
1810: 런던 코벤트 가든의 피아짜 홀에 세계 최초의 대중 당구장이 설치되었다.
1812: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참패하여 철수하였다. 베토벤의 교향곡제3번 영웅이 초연되었다.
비엔나의 베트벤플라츠에 있는 베토벤 기념상의 상단
휘델리오의 초연은 1805년, 1806년, 1814년의 세 번에 걸친다. 어째서 그런가? 처음에는 극장주의 요청에 의하여 대본대로 작곡을 했지만 너무 길어서 3막을 2막으로 줄여 다시 초연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나폴레옹 군대가 비엔나를 점거하자 사람들은 오페라보다도 전쟁과 개혁에 관심을 두었다. 베토벤은 축소판 개정본에 대하여도 썩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나폴레옹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베토벤은 세 번째 수정 작업에 착수하여 세 번째의 휘델리오 초연을 가졌다. 한편 베토벤은 휘델리오라는 타이틀로 그 당시까지 나와 있던 작품들, 즉 페르디난드 페르(Ferdinande Paer: 1771-1839)의 La Leonore, 시몬 마이르(Simone Myre: 1763-1845)의 L'amore coniugale(부부애), 그리고 피에르 가보(Pierre Gaveaux: 1760-1825)의 휘델리오(또는 부부애)와 자기의 휘델리오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베토벤은 서곡만 4번이나 고쳐 썼다. 4편의 서곡중 처음 작곡한 3편은 레오노레 1번, 2번, 3번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마지막 서곡에만 휘델리오 서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휘델리오'. 죄수들의 자유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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