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에스터하지와 하이든

정준극 2008. 3. 5. 09:06

에스터하지와 하이든

              

에스터하지가에 봉사하고 있을 당시의 하이든

 

하이든의 이력서에서 에스터하지(Esterhazy)라는 이름은 빼놓을수 없는 사항이다. 하이든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생활을 선호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불안정한 생활은 하이든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성품의 하이든에게 합스부르크의 명문 에스터하지 가문이 안정적인 생활을 제공해 주자 오랫동안 눌러 있게 되었다. 헝가리의 명문 가문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에 큰 기여를 한 에스터하지 가문은 에스터하자(Esterhaza)와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에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든은 주로 비엔나에서 자동차고 한시간 거리인 아이젠슈타트에서 생애의 상당부분을 보냈다. 지금도 아이젠슈타트에는 하이든 박물관이 있으며 하이든의 유해는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갈보리교회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하이든을 1761년부터 에스터하지가(家)에 봉사하였다.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하우스. 햔재는 기념관이다.


처음에 섬긴 에스터하지가의 공자(Prince)는 파울 안톤(Paul Anton)이었다. 그로부터 하이든은 거의 30년 동안 에스터하지 가족을 위해 작곡을 하고 연주회를 가졌다. 파울 안톤의 아들인 니콜라우스(Nicolaus)는 상당한 음악 애호가였다. 따라서 하이든의 작곡 생활도 니콜라우스의 보호아래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의 아들 안톤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경비절감이라는 명목아래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오케스트라를 해산하기까지 했다. 오케스트라를 해산할 때에 연주된 하이든의 교향곡이 ‘놀람 교향곡’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비록 오케스트라를 해산하기까지 했지만 안톤은 하이든의 그 동안의 봉사를 참작하여 4년이나 더 데리고 있었다. 안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니콜라우스(안톤과 니콜라우스라는 이름이 반복되므로 혼돈하지 않기를 바람)가 과거 에스터하지 가문의 음악애호열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이든을 우대하였다. 특히 니콜라우스의 부인인 리히텐슈타인의 왕녀 마리아는 하이든에게 많은 후원을 보냈다. 미사곡인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는 마리아왕녀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에스터하지 궁의 하이든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