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80-1900) 베리스모로 가는 길: 카발, 팔리, 그리고 푸치니

정준극 2008. 3. 5. 09:24

(1880-1900) 베리스모로 가는 길: 카발, 팔리, 그리고 푸치니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83: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시작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1884: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이탈리아의 유명 음악 출판인인 에도아르도 산조냐(Edoardo Sanzagno)가 주관한 신인 작곡 대회에 출전하여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서 하루  아침에 작곡자와 작품이 모두 유명하게 되었다. 인공 비단이 개발되었다. 마스네가 마농을 작곡했다.

1892: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마스네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베르테르(Werther)를 작곡했다.

1894: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이 발표되었다.

1897: 브람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처음으로 색채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 필름에 색을 칠한 것이었다.

1898: 큐리 부인이 라디움을 발견했다. 사라 베른하르트의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라 스칼라의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라 스칼라, 나아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무대는 토스카니니가 압도하였다.

1901: 위대한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가 20세기가 겨우 시작되던 때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재산의 상당부분을 밀라노에 세운 ‘원로 음악인을 위한 집’에 기증하였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여왕이 세상을 떠났으며 미국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마르코니의 모르스 부호가 대서양을 건너 전파되었다. 그리고 첫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발표할 당시의 피에트로 마스카니


바그너의 음악은 실로 전 유럽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까지 바그너태풍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 국가들이 바그너의 라이트모티브 테크닉을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가 시도한 새로운 무대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대는 막(Act)과 장(Scene)으로 구성된다. 바그너는 장(Scene)보다는 막(Act)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바그너에 있어서 막(Act)은 음악 연출의 가장 기본단위였다. 그리고 오페라에 있어서 오케스트라가 지금까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했다. 알프레도 카탈라니의 La Wally(라 왈리)와 젊은 푸치니의 Le Villi(르 빌리)를 보면 그러한 점을 인식할수 있다. 이 두 작품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가 갈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투리두에 플라시도 도밍고, 산뚜짜에 타티아나 트로야노스

       

그러던중 1890년 마스카니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서 이러한 변화의 장에 혜성과 같이 뛰어 들었다. 베리스모(Verismo), 또는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장르의 오페라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음악 스타일을 약간 멋을 부린 비빔밥일 뿐이었다. 막간음악(간주곡)은 바그너 스타일이었고 하모니는 프랑스 스타일이었으며 아리아만이 장식음이 딸린 전통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이었을 뿐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은 대사가 시처럼 음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체였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주제였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의 평범한 삶과 그 삶 속에 스며있는 격정을 다룬 것이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베리스모라는 댐의 수문을 열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를 이어 레온카발로의 2막 오페라 팔리아치(1892)가 나왔다. 그로부터 ‘카발’과 ‘팔리’는 단짝을 이루어 공연되기 시작했다. 베리스모가 등장한 간접적인 배경은 간단하다. 1차 대전이 끝난후 사람들은 가난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때에 노르마가 어떻고 이탈리아 여인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일종의 허영이고 사치였다. 그건 귀족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릴없어서 하는 짓거리들이며 가난에 찌든 서민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하루 한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을 위한 오페라가 필요했다.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진정한 사랑을 일깨워 주어 따듯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작품이 필요했다. 이것이 현실주의, 사실주의의 기본이었다.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로베르토 알라냐


‘카발’과 ‘팔리’의 뒤를 이어 베리스모의 기치 아래 출전한 대표작들은 레온카발로의 Zazà(자자: 잠을 자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이름임), 칠레아의 L'arlesiana(아를르의 여인)과 Adriana Lecouvreur(아드리아나 르쿠브로), 조르다노의 Andrea Chénier(안드레아 셰니에)와 Fedora(훼도라), 그리고 마스카니의 Iris(이리스) 등이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이들 작품들은 다음에 올 푸치니의 신 들메를 묶을 준비용이었다.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요나스 카우프만, 율리아 메니바에바. 리세우 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