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60-1915) 드빗시의 조용한 반란: 플레아와 멜리상드

정준극 2008. 3. 5. 09:49

(1860-1915) 드빗시의 조용한 반란: 플레아와 멜리상드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62: 루이 파스퇴르는 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인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이 발견으로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여 오래 살게 되었고 세계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클로드 드빗시가 태어났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작인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1902년 파리 오페라 코믹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93: 유럽에서 아르 누보(Art Nouveau)가 등장했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꽃과 잎들을 모양을 내어 디자인한 것이다. 심지어는 오페라 무대의상도 아르 누보 스타일을 따랐다.

1900: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 대한 이론을 발표하였다. 꿈은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사항의 표현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프로이드의 학설은 오페라 플롯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07: 뉴욕에서 지그펠트 폴리스(Siegfeld Follies)가 대인기를 끌며 등장했다. 폴리(Folly)는 잘 생긴 젊은 여자들이 나와 매력적인 연극을 하거나 오늘날의 라인 댄스(Line Dance)처럼 한 줄로 서서 각선미를 자랑하며 춤을 추는 것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도였다.


클로드 드비시


Pelleas et Melissande(플레아와 멜리상드)는 인상주의 작곡가 드빗시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된 때인 1902년 첫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그때까지 고전에 바탕을 둔 프랑스 음악계에 하나의 조용한 반란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도 바그너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바그너는 프랑스 오페라 무대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드빗시는 바그너의 무드에 전혀 물들지 않았다. 드빗시가 바그너의 취향을 답습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이 드빗시를 20세기 현대 음악의 선구자로 만들었을까? 드빗시는 리듬은 악보로 표현할수 없다는 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주제는 오케스트라의 색깔을 암시한다.’는 생각과 함께 ‘음악에는 이론이란 것이 필요 없다.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규칙이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주장일까?

 

클로드 드비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 우물 장면. 오페라 코미크


사실 따지고 보면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대단히 집중적인 작품이다. 대사는 절약이 미덕이라는 듯 최대로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멜로디는 바그너 이상으로 단조롭다. 마치 조용하게 연설하는 것과 같다. 어찌보면 아무런 매력도 없는 무미건조한 음악과 같다. 그렇지만 정말로 말할수 없이 지능적이고 미묘하게 조성되어 있음을 알수있다. 무언가 무기력하게 도취케하는 힘이다. 이 오페라는 기이한 성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여인 멜리상드와 그의 남편의 동생(시동생)인 플레아 사이에 얽힌 이해하기 어려운 단순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 간단함이 완벽함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바그너의 Tristan und Isolde(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프랑스적 스토리라고 할수 있다. ‘플레아와 멜리상드’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20세기의 걸작이라고 하는 바르토크의 The Bluebeard's Castle(푸른 수염의 성)과 알반 베르크의 Wozzek(보체크)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피날레. 메트로폴리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