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900-1940) 쇼스타코비치와 사회현실주의

정준극 2008. 3. 5. 09:54

(1900-1940) 쇼스타코비치와 사회현실주의: 레이디 맥베스의 스캔들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916: 러시아 황실을 미혹으로 흔들었던 라스푸틴에 대하여 반대파들이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총으로 쏘아 죽였고 시체는 운하에 버렸다. 이고르공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스페인의 그라나도스가 미국을 방문한 후 배를 타고 귀국하는 중에 영국인근 해역에서 익사했다. 

1934: 영국의 존 크리스티(John Christie)라는 사람이 소프라노 아내인 오드리 밀드메이(Audrey Mildmay)를 위해 고향인 서섹스의 글린드본(Glyndebourne)에 오페라 극장을 건설했다. 당시 오페라는 전원의 아름다움을 무대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존 크리스티는 글린드본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오페라 극장을 지었다. 나중에 글린드본은 세계적 음악제의 무대가 되었다. 

1940: 할리우드의 월트 디즈니가 처음으로 만화영화 피노키오를 내놓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1941: 러시아의 저명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나치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점거했을 때 소방수로 활동했었다. 그해 12월에는 일본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본격화 되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레닌의 신소련 사회주의 치하에서는 작곡가들이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활동을 하였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모험적인 작곡가였다. 러시아현대음악협회의 일원이었다. 이 협회는 서구 현대음악의 연주와 연구를 적극 주도하였다. 그래서 그의 풍자적 오페라 Nos(코: The Nose)가 1930년에 초연되었을 때에는 오페라의 내용이 사회 및 체제 비판하는 사실주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검열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러시아에서 음악적 사실주의의 선구자는 알렉산더 다르고미츠스키(1913-69)였다. 그는 서민층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한 인물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다르고미츠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다르고미츠스키는 브뤼셀과 파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소련 사회주의의 손길 밖이었다. 레닌이 죽자 사정은 달라졌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자 모든 음악활동은 국가의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실험적 음악활동은 금지되었다. 인민을 위한 공산주의적인 음악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구의 맥베스 부인'의 한 장면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두 번째 오페라를 거의 완성해 놓았다. Katerina Izmaylova(카테리나 이즈마이로바: 므첸스크구의 맥베스 부인: The Lady Macbeth of the Mtsensk District.)이었다. 당시 러시아 여성들의 힘든 생활에 대한 3부작이었다. 1934년 초연된 이후 이 오페라는 러시아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성 페테르부르크)에서 83회 공연되었고 모스크바에서는 97회 공연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1936년 스탈린이 이 오페라를 본후 얘기는 달라졌다. 스탈린이 측근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다음날 관영 프라우다지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비판했다. 그후 ‘맥베스 부인’은 1963년까지 무대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어야 했다. 단, 1963년에도 내용이 대폭 수정된 후에야 공연이 가능했다. 스탈린이 ‘맥베스 부인’을 비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진실로 예술에 대하여 무지한 당국이 그의 제4교향곡도 공격할것 같아 아예 작곡을 취소했었다.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의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