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890-1950) 돌아온 반란자: 프로코피에프의 오렌지

정준극 2008. 3. 5. 09:54

(1890-1950) 돌아온 반란자: 프로코피에프의 오렌지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914: 사라예보에서 프란츠-페르난드 대공이 암살당하였고 이로서 1차대전이 촉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 챨리 차플린의 첫 영화가 나왔다.

1936: 프로코피에프의 ‘늑대와 소년’이 모스크바의 어린이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어 대인기를 끌었다.

1950: 미국에서 페니실린이 40만 파운드나 생산되었다. 한국에서는 공산 북한에 의한 6.25 사변이 터졌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보다 더 완고하고 더 반항적인 인물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였다. 젊은 시절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의 표현에 있어서 상당히 극단적이었다. 그는 자기의 후원자이며 지도자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에 대하여도 오히려 강력하게 반응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초기의 오페라인 Maddalena(맛달레나)와 The Gambler(도박자)를 러시아에서 완성하고 나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간신히 미국으로 건너갔고 나중에는 파리에서 살았다. 그는 대서양을 배로 건너면서 카를로 고찌(Carlo Gozzi)의 소설 Amore delle tre Melarance라는 희곡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펴졌다. 결과는? 1921년 시카고에서 초연된 오페라 Love of Three Oranges(세개의 오렌지 사랑)이었다. 거칠고 불합리하며 초자연적인 내용의 오페라이다. 하지만 마치 림스키-코르사코프 스타일의 신비스러움과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와 같은 찬란하게 빛나는 그 무엇이 있는 작품이었다.

 

 프로코피에프의 '세개의 오렌지 사랑'


프로코피에프는 ‘오렌지’를 완성하기 이전에 The Fiery Angel(격렬한 천사)를 작곡하고 있었다. 이 오페라는 1927년에 완성을 보았지만 1954년에야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오렌지’보다 무거운 ‘격렬한 천사’는 악마에게 사로잡힌 어떤 광신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악은 장식적이고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다. 대단한 격찬을 받은 작품이다. 사람들은 오페라 ‘격렬한 천사’가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 오페라라고 평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몇차례 방문한 일이 있다. 그리고 1936년, 소련으로 영구히 돌아왔다. 소련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작품성향은 보수적이었다. 코믹 오페라인 Duenna(보모: 수도원에서의 결혼일명)도 이때에 나온 것이다.


프로코피에프의 '격렬한 천사'(The Fiery Angel). 마리인스키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