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베이스

금세기 최고의 베이스 Feodor Chaliapin (훼오도르 샬리아핀)

정준극 2008. 3. 5. 12:43
 

역사상 기장 위대한 베이스 Feodor Chaliapin (훼오도르 샬리아핀)


 

오페라 데뷔 시절의 훼오도르 샬리아핀

 

 

금세기 최고의 베이스인 훼오도르 샬리아핀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성악가로서는 처음으로 최고의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때까지 러이사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성악가들이 앞을 다투어 활동하였고 본국인 러시아 성악가들은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향이었다. 훼오도르 샬리아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이스이다. 그의 강력한 음성, 뛰어난 성악적 테크닉, 그리고 무대를 압도하는 연기는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무대에서 자연적 연기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성공시킨 아티스트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연기는 각본과 연출에 의한 짜여진 것이 아니라 음악적 분위기에 합당한 자연적이고도 본능적인 연기였다. 1873년 카잔(Kazan)의 외메트 타위(Ömet Tawi)에서 태어난 그는 성악을 거의 혼자의 힘으로 마스터하였다. 따라서 누구에게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할수 있었다. 그는 성악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연기, 그리고 화가로서의 교육도 받았다. 그의 연기 스타일과 노래 스타일은 상당히 폭이 넓었다. 어떤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든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오페라에서의 연기가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볼쇼이와 마리인스키 극장에서부터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세계적 베이스-바리톤 샬리아핀 


첫 오페라 데뷔는 1894년 생 페테르부르크의 제국극장에서 트빌리시(Tbilisi)를 맡은 것이었다. 그후 1901년부터 유럽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그해 라 스칼라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의 타이틀 롤을 맡아 국제적인 명성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날 전 밀라노는 이 러시아의 베이스에 대하여 거의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뉴욕 데뷔는 1907년이었다. 그러나 메트로의 공연은 그다지 열광적인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921년 다시 메트로를 방문하였다. 엄청난 성공이었다. 샬리아핀은 그후 여덟 시즌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샬리아핀은 전통적인 러시아 베이스로서 공연하였을 뿐이었다. 그를 세계의 독보적인 베이스로 만들어준 계기는 1908년 파리와 1913년 런던에서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한 것이었다. 그는 보리스 고두노프로서 러시아 색감이 흠뻑 담겨있는 독창적인 베이스를 선보여 세계의 음악계에 신선한 놀라움을 전해주었다.

 

보리스 고두노프 역의 샬리아핀

 

샬리아핀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그 오페라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연구했다. 자기의 역할에 대하여 놀랄 만큼 진지하게 접근한다. 그는 자기 한 사람의 부주의로 모든 공연이 영향을 입는다면 그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예술성과 예술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일상생활에서도 성실함과 진지함을 앞세우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메이크업과 의상뿐만 아니라 극적인 준비, 음악적인 준비에서 완벽주의를 지향한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대단히 집중하여 연기와 노래를 부른다. 그는 오페라를 접근함에 있어서 베이스이기 전에 배우임을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은 콘서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너 짜이퉁(Wiener Zeitung: 비엔나 신문)은 샬리아핀에 대하여 ‘성악가 샬리아핀과 배우 샬리아핀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악가로서의 역할을 끝냈다고 생각하면 곧이어 배우로서의 역할을 시작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가지 역할은 무대에서 동시에 활약한다.’고 평했다.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가 그의 오페라 메피스토펠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샬리아핀에 대하여 ‘마침내 나는 그렇게도 염원했던 완벽한 나의 악마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샬리아핀은 ‘예술의 가장 높은 경지는 인간의 영혼을 파고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메피스토펠레의 역할에 대하여 심혈을 다 기울였음을 털어놓았다.  

 

 돈키호테 역의 샬리아핀. 분장에 따라 이렇게도 변할수 있다.


샬리아핀은 혁명후 얼마동안 러시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동조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처음에는 위대한 소련의 예술가로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공산주의 정권이 로마노프 왕조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1922년 그는 반혁명주의자로 낙인찍혀 영구 추방당했으며 러시아에 있는 그의 재산과 모든 사회적 직위는 박탈당했다. 세계 최고의 위대한 베이스 샬리아핀은 1938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45년 후인 1984년, 그의 유해는 파리로부터 모스크바로 옮겨져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역에 안장되었다. 샬리아핀은 비망록을 남겼다. ‘인간과 마스크: 노래 생활 40년’(Man and Mask: Forty Years in the Life of a Singer)라는 제목이다. 그는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보리스 고두노프로 남아있다.

 

 메피스토펠레 역의 샬리아핀

 

러시아의 노보데비치(Novodevichy)에 있는 샬리아핀의 묘지. 기념상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