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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광 Gérard Souzay (제라르 수제이)

정준극 2008. 3. 5. 12:46
 

프랑스의 영광 Gérard Souzay (제라르 수제이)


제라르 수제이

 

베이스-바리톤 제라르 수제이는 프랑스의 영광이다. 그는 피에르 베르나크(Pierre Bernac)이래 최고의 프랑스 예술가곡 해석자였다. 그는 실제로 피에르 베르나크의 제자였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언어 재능이 있었다. 그는 15개 외국어에 능숙하였다. 심지어는 방언과 사투리까지 대단히 능란하였다. 그는 43년동안 오페라 출연, 콘서트와 리사이틀, 그리고 수많은 레코딩을 하였다. 그가 취입한 음반은 무려 750개 타이틀로 출반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베이스-바리톤인 제라르 수제이는 1918년 프랑스의 앙제르(Angers)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결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을 마친후 철학공부를 더 전문적으로 하기위해 파리로 갔다. 그러나 파리에서 철학보다는 성악에 더 재능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피에르 베르나크, 로테 레만등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들로부터 레슨을 받은후 파리음악원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그는 1940년부터 파리음악원에 다니기 시작하여 1945년 전쟁이 끝나는 것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는 전학년 우등생이었다.


수제이는 파리음악원을 졸업하기 1년전인 1944년 성악가로 출발하여 1950년에 뉴욕에서 데뷔하였으며 오페라 데뷔는 그로부터 8년후인 1958년 액-생-프로방스에서 비밀결혼(치마로사)과 ‘디도와 이니아스’(퍼셀)에서 바리톤 주역을 맡은 것이었다. 그후로부터 그는 콘서트와 리사이틀 경력과 함께 오페라 경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1960년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수제이를 뉴욕시티오페라에 초청하여 몬테베르디의 Favola d'Orfeo의 오르페오를 맡도록 했다. 이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수제이는 오페라 베이스-바리톤으로서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2년후인 1962년 이번에는 에르네스트 안세르메(Ernest Ansermet)가 그를 로마오페라에 초청하여 ‘플레아와 멜리상드’에서 굴라드(Golaud)를 맡도록 했다. 수제이는 그 해에 굴라드를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다시 공연하였다. 드빗시 탄생 1백주년 기념공연이었다. 이듬해 그는 파리오페라에서 돈 조반니를 처음으로 맡아하여 드디어 대망의 파리 그랑 오페라에 진출하였다. 파리 그랑 오페라의 공연은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공연이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드디어 메트로에서 알마비바 백작(피가로의 결혼)을 맡아 무대를 압도하였다.

 

제라르 마르셀 수제이 


그는 수많은 레코딩을 하였고 수많은 음반상을 받았지만 다른 성악가들과 듀엣이나 트리오로 레코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의 누이동생인 소프라노 즈느비에브 투렝(Genevieve Touraine), 그리고 제르멩 뤼뱅(Germaine Lubin) 및 엘리 아멜링(Elly Ameling)과 듀엣을 레코딩하였을 뿐이었다. 자매는 용감하였다.


Pierre Bernac (피에르 베르나크): 제라르 수제이의 스승인 피에르 베르나크는 1899년 파리에서 태어난 걸출한 프랑스의 바리톤이며 음악교사로서 당대를 풍미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성악인으로서 늦은 출발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파리에서 아버지 사업을 도와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그후 음악적 재능을 스스로 발견한 그는 프랑스가곡을 위주로 공부를 하여 마침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풀랑크, 오릭(Auric), 드빗시, 라벨, 오네거, 미요, 에저 등 프랑스 작곡가의 가곡작품을 뛰어나게 해석하고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는 플랑크와는 각별한 친구사이였다. 플랑크는 베르나크를 위해 여러편의 가곡을 작곡하였고 특히 베르나크의 유럽과 미국 연주회에서는 피아노 반주를 맡아 최고의 앙상블을 이루었다. 베르나크는 프랑스 음악계를 위해 귀중한 저서를 발간하였다. 1970년에 내놓은 책은 ‘프랑스 가곡의 해석’이라는 것이며 친구 플랑크를 회상하여 1977년 ‘프란시스 플랑크: 그의 인간과 그의 노래’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