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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음의 민권운동가 Paul Robeson (폴 로우브슨)

정준극 2008. 3. 5. 12:51
 

위대한 저음의 민권운동가 Paul Robeson (폴 로우브슨)

 

폴 로브슨


 

미국의 위대한 베이스이며 배우였던 폴 로우브슨은 뛰어난 저음으로도 유명했지만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였던 인물로 더 유명했다. 그는 오페라에 출연하여서도 놀라운 감동을 보여주었지만 그보다도 흑인영가(Negro Spirituals)를 불러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의 첫 오페라 역할은 1922년 뉴욕 할렘의 YMCA에서 공연된 음악연극 ‘구레네 사람 시몬’(Simon the Cyrenians)에서 시몬을 맡은 것이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갔던 사람이다. 그는 이 역할을 맡고난후 차별받고 있는 미국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924년, 그는 유진 오닐의 ‘황제 존스’(The Emperor Jones)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이어 그는 ‘포기와 베쓰’에서 크라운(Crown), ‘오텔로’에서 타이틀 롤등을 맡으면서 엄청난 성량의 베이스로서, 그리고 무대를 압도하는 배우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프라노 우타 하겐(Uta Hagen)과 공연한 오텔로에서의 폴 로브슨


그는 배우로서 1925년부터 1942년 사이에 10여편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였다. 대표적인 역할은 ‘황제 존스’의 타이틀 롤, ‘쇼 보트’의 조(Joe), ‘솔로몬왕의 동굴’에서 원주민추장 움보파(Umbopa)를 맡은것 등이다. 쇼 보트에서 조가 부르는 Ol' Man River는 아직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이다. 그는 유럽과 소련을 자주 방문하여 연주회와 함께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50년대의 미-소 양진영은 냉전으로 극도의 고조된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우브슨은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들을 방문하여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인권침해 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는 특히 미국 남부주에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 선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입이 걸고 말이 많았던 그는 소련과 스탈린에 대하여 동정 내지 동조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결국 1941년부터 무려 30여년간 FBI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감시를 받아야했다. 그러다가 1974년에 가서야 FBI는 ‘계속 감시 필요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권운동가 폴 로브슨 포스터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외국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영국 남부 웨일스지방은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여러번 방문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주장을 발표해도 무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로부터 남부 웨일스로 끌려온 흑인 노동자의 생활을 그린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로우브슨의 마음으로부터의 연기와 노래는 웨일스 주민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1949년 여름, 그는 소련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가졌다. 모스크바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에는 ‘인민전투가’(People’s Battle Song)를 불러 15분 이상이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해 말, 그는 뉴욕의 픽스킬(Peekskill)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런데 반공단체와 인종주의자들이 극장 밖에서 기다리다가 연주가 끝나서 돌아가는 관객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경관들은 주위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만하고 있었다. 로우브슨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당시 미국사회에서 펼쳐졌던 반공운동인 저명인사들의 비공산주의 성명서 서명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HUAC, 즉 미하원 맥카타이트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미국무성은 HUAC의 권고를 받아들여 로우브슨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로우브슨은 미국에만 있어야 했다.

 

 1983년 당시 동독이 발행한 폴 로브슨 기념우표.


 

1952년 그는 미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연주회를 가졌다. 5월 18일, 그는 국제평화아치(Int’l Peace Arch)라는 단체의 주선으로 미국 서북쪽 워싱턴주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와의 국경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 밖으로는 나갈수 없다는 당국의 억제에 항거하기 위한 연주회였다. 이날 캐나다쪽에만 무려 4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노래를 듣고 박수를 보냈다. 1959년 미국 정부는 그에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그는 미국을 떠나 영국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1963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그는 필라델피아에 살면서 절망과 병마에 시달려야했다. 아마 공산주의에 대한 실망, 특히 스탈린이 유태인들에게 보여준 극도의 핍박을 보고 절망을 느꼈던 것 같다. 로우브슨에게는 소련에 여러명의 유태인 예술가 친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스탈린의 독재로 시베리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폴 로우브슨의 75회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이 카네기홀에서 있었다. 로우브슨은 참석치 못했다. 대신 그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무대에서 틀었다.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났으며 뉴욕의 하츠데일(Hartsdale) 묘지에 안장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그의 별세 뉴스를 1면에 실었다.

 

 폴 로브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