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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자랑 Walter Berry (발터 베리)

정준극 2008. 3. 5. 12:56
 

비엔나의 자랑 Walter Berry (발터 베리)

 

발터 베리(월터 베리)

 

미성의 베이스 바리톤인 오스트리아의 발터 베리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고정 멤버로서 파파게노의 역할을 주로 맡아하였다. 비엔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발터 베리와 파파게노는 같은 이름이었다. 발터 베리는 1929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2000년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였다. 발터 베리는 40여년에 이르는 오페라 생활에서 비엔나 뿐만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관중들에게 따듯하고 명랑한 기쁨을 주었다. 그가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것은 그가 아직도 비엔나음악원의 학생이었던 1947년이었다. 자니 스키키에서 시모네를 맡았다. 감미로운 음성은 모두의 마음을 흡족하게 적셔 주었다. 이어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서 활슈타프를 맡았다. 어려운 역할이었지만 타고난 연기력과 음성으로 한없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서 맡은 역할은 로르칭의 '차르와 목수'에서 베트였다. 발터 베리는 촉망받는 젊은 성악가로서 탁월한 연기력과 함께 오페라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발터 베리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평생을 보냈다. 다만, 여름철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참석하느라고 비엔나를 떠나 있었을 뿐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1952년부터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처음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의 역할은 작은 것이었다. '가면무도회'에서 실바노가 첫 역할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부터는 '돈 조반니'의 마제토를 맡았다. 그리고 파파게노와 피가로에 이어졌다. 발터 베리는 파파게노와 피가로로서 다른 극장으로부터 빈번한 초청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는 '여자는 다 그래'에서 뛰어난 구글리엘모였으며 돈 알폰소였다. 특히 돈 알폰소는 칼 뵘의 지휘로 1962년에 취입한 EMI 레코드에서 맡은 역할이었다. 해를 거듭할 수록 발터 베리의 음성은 힘이 있고 폭이 넓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다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을수 있게 되었다. 알반 베르크의 '보체코'를 맡은 것은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게 해 준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체크로서 만족할 발터 베리가 아니었다. 그는 보다 광범위한 역할을 맡아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살로메'의 세례 요한(요카난),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네 개의 악역, 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에서 모로네 추기경, 그리고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에서 바그너의 보탄(발퀴레)을 맡아 전천후 베이스 바리톤으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메트에서의 첫 데뷔는 1966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에서 바라크를 맡은 것이었다. 또 하나 발터 베리의 전담 역할은 바르코크의 '푸른 수염의 공작'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그가 부인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함께 '푸른 수염'을 취입한 음반은 지금까지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발터 베리는 1956년에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오페라에 함께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페라 무대 뿐만 아니라 콘서트에도 함께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오페라로서 가장 뛰어났던 것은 '장미의 기사'였다.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마샬린을 맡았도 발터 베리는 옥스 남작의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1960년대를 통해서 비엔나는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공연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1971년 이혼하였다. 발터 베리는 뛰어난 가곡 해석자였다. 슈베르트와 말러의 가곡을 특히 선호하였다. 그는 합창에 있어서도 훌륭한 솔리스트였다. 그는 오페라 뿐만 아니라 비엔나 오페레타에서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박쥐'에서 활케 박사의 역할이었다. 비엔나 토박이라는 잇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노래하는 발터 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