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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자 Titta Ruffo (티타 루포)

정준극 2008. 3. 5. 12:55
 

노래하는 사자 Titta Ruffo (티타 루포)

 

티타 루포


 

그의 원래 이름은 루포 티타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티타 루포로 이름을 바꾸었다. 티타 루포는 이탈리아의 피사(Pisa)에서 가난한 주물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이탈리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주물공으로서 도제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희망은 저버리지 않았다. 마침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아낀 몇 사람들이 후원하여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할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름도 티타 루포라고 바꾸었다. 산타 체칠리아에서 그는 유명한 벤체슬라오 페르시키니로부터 잠시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키니(Persichini)는 다른 제자에게 더 전념하였다. 주세페 데 루카(Giuseppe de Luca)였다. 루포는 다른 선생에게서 레슨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성숙한 베이스가 되도록 해준 계기였다. 1898년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며 리골레토, 바르바나, 돈 카를로 등 주역을 맡아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코벤트 가든, 남미, 제정러시아에서 개선장군과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1905년 그는 그의 대표적 역할이라고 할수 있는 토마(Thomas)의 암레토(Amleto)는 격찬을 받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암레토로서 전국 유명 오페라극장의 무대에 섰다. 어떤 오페라극장은 단지 루포의 암레토를 위해 공연스케줄을 잡기도 했다.    

 

 햄릿 역할의 티타 루포

 

 

루포는 카루소와 함께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카루소는 루포를 메트로에 초청하였고 이로써 루포는 1922년 메트로에 데뷔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우정을 다지며 지냈다.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불행하게도 그의 소리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7년동안 머물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나중에 루포는 ‘나는 제대로 성악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나이 50에 나의 소리는 끝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얼마후 이탈리아는 무쏠리니의 독재 아래에 들어갔고 루포는 파치스트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활동도 할수 없었다. 루포의 처남은 대단히 열렬한 반파치스트주의자였기 때문에 파치스트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데뷔시절의 티타 루포


루포는 생전에 ‘노래하는 사자’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런 별명은 그의 외모와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루포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인상이었으며 그의 머리는 마치 사자머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천부적인 소리는 놀랄만한 힘이 있어서 정말로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 같았다. 나이가 들어 그의 소리가 힘이 줄어들자 평론가들은 ‘죽어가는 사자’라고 말했으며 루포 자신도 1936년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을 마감하면서 ‘사자는 이제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성시기에 루포의 소리는 야성의 동물적인 성향을 띠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볼때 그는 자연주의자였으며 말할 나위도 없이 순수한 벨칸토 베이스였다. 그의 최대 장점은 고음에서 비길수 없이 힘찬 소리를 낼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때는 그의 베이스 소리가 테너의 영역까지 올라갔다. 베이스로서 루포는 색채감 있는 팔레트를 최대한 사용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가 어떻게 가벼운 소리와 어두운 소리를 혼합하여 사용했는지를 적어 놓았다. 루포가 아직 젊을 때에 한번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넬리 멜바와 리골레토를 공연한 일이 있다. 멜바는 신참 루포를 은근히 얕잡아 보면서 ‘저렇게 젊은 사람이 나의 아버지로 나오다니! 같이 노래할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루포는 ‘내 딸 질다가 저렇게 늙었다니 함께 노래하기가 어렵네요!’라고 대꾸해 주었다고 한다. 유명한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 생애에 세가지 기적을 보았다. 카루소, 폰셀레, 그리고 루포이다!’라고 말하며 루포에게 찬사를 보낸 일이 있다.

 

 미국에 도착한 티타 루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