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셰(Luigi Lablache)

정준극 2010. 10. 28. 07:10

루이지 라블라셰(Luigi Lablache)

위대한 레포렐로, 돈 파스쿠알레 이미지 창조

 

루이지 라블라셰

 

루이지 라블라셰(1794-1858)는 프랑스와 아일랜드 계통의 이탈리아 성악가이다. 그는 강력하면서도 경쾌한 베이스 음성을 지닌 성악가로서 코믹한 연기에 뛰어났다. '돈 조반니'에서 레포렐로와 '사랑의 묘약'에서 둘까마라 역할은 그의 등록상표였다. 루이지 라블라셰는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르세이유 출신의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루이지는 나폴리에 있는 '투르치니의 피에타 음악원'에서 음악기본과 성악, 그리고 동시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웠다. 소년 시절, 그는 음악보다는 연극이 더 좋았다. 그래서 배우가 되려고 무려 다섯번이나 음악원을 도망나온 경력이 있다. 그때마다 잡혀서 다시 음악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음악원에서는 아주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힐 정도였다. 소년 시절에 루이지 라블라셰의 음성은 아름다운 콘트랄토였다. 그래서 1809년 하이든이 서거하였을 때에는 모차르트의 '진혼곡'에서 콘트랄토를 노래했다. 잘 아는대로 하이든은 모차르트보다 18년을 더 살았다. 그것이 라블라셰가 콘트랄토로서 마지막이었고 이후로는 남성 베이스의 역할에 치중하였다.

 

20세의 청년이 되었을 때 그의 음성은 참으로 장엄하게 발전하였다.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의 음역은 놀랍게도 E 플랫으로부터 베이스의 고음 영역을 훨씬 지나서 E 플랫까지였다. 루이지가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18세 때인 1812년이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공했다가 후퇴한 그 해였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 자리를 얻어 들어가서 발렌티노 피오라반티(Valentino Fioravanti)의 '라 몰리나라'(La Molinara)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후 1817년, 23세 때까지는 팔레르모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명성은 점차 전국에 퍼져 라블라셰는 바로 그 해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 진출할수 있었다. 라 스칼라 데뷔는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에서 단다니였다. 놀라운 음성과 연기로 대갈채를 받았다. 사베리오 메르카단테(Daverio Mercadante)는 루이지 라블라셰의 뛰어난 음성과 놀라운 연기를 보고 감동하여 1821년 루이지 라블라셰를 위해 오페라 '엘리사와 클라우디오'(Elisa e Claudio)를 작곡했다. 루이지 라블라셰의 이름은 유럽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루이지 라블라셰와 줄리아 그리시. 1835년 런던에서 '청교도' 공연 장면

 

밀라노에서 인정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베니스 등지에서 무대에 섰으며 1824년, 30세 때에 비로소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입성하였다. 루이지 라블라셰는 비엔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 루이지 라블라셰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고향 나폴리를 떠난지 12년 만에 고향을 찾아갔다. 로시니의 '세미라미데'에서 아쑤르(Assur)를 맡아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런던에 등장한 것은 1830년이었다. 당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던 치마로사의 코미디 오페라인 '비밀결혼'(Il matrimonio segreto)에서 제로니모를 맡아 청중들을 열광케 만들었다. 그로부터 라블라셰는 비엔나에 거처하면서 매년 정기적으로 런던을 방문했다. 라블라셰는 비엔나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지냈다. 슈베르트와도 가깝게 지냈다. 슈베르트는 라블라셰보다 세살 아래이지만 스스럼없는 친구로서 지냈다. 슈베르트는 라블라셰를 위해 이탈리어어로 된 세곡의 노래 (Op 83, D 902)를 작곡했다. 이 노래들은 슈베르트가 마지막 작품 중에 속하는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가곡 중에서 로시니 스타일로 알려진 것들이다.

 

둘까마라로 분장한 라블라셰

 

라블라셰는 음성만큼이나 체격도 장대하였다. 장대한 체격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코믹하고 유머에 넘친, 그런가하면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을 만들어 냈으며 또는 비탄에 젖어 있는 음성도 쉽게 만들어냈다. 배우로서 그는 코믹이건 비극이건 어떤 역할이든지 놀랄만큼 소화하였다. 라블라셰의 대표적인 역할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돈 조반니'에서 레포렐로였다. 아마 역사상 그 누구도 레폴렐로에서는 라블라셰를 능가할 인물이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로시니의 La gazza ladra(도둑까치)에서 화브리치오, La Cenerentola(라 체네렌톨라: 신데렐라)에서 단디니, 도니제티의 Anna Bolena(안나 볼레나)에서 핸리8세, Marino Faliero(마리노 활리에로)에서 총독, 벨리니의 Norma(노르마)에서 오로베소로서 뛰어났다. 그는 1843년 도니제티의 Don Pasquale(돈 파스쿠알레)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은 오페라 역사에 기록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유쾌한 돌파리 의사 둘까마라 역할은 지금까지도 라블라셰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두가지 서로 상반된 다른 역할에 집중하였다. 스크라이브의 L'Eoile du Nord(북극성)에서 칼무크, 셰익스피어의 칼리반(Caliban)였다. 그는 진정으로 연기를 마스터한 베이스였다.

 

작곡가이며 19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노 비르투오소인 지기스몬트 탈버그는 라블라셰의 사위이다. 

 

1827년 비엔나에서 베토벤의 장례식이 거행될 때에 그는 횃불을 들고 운구를 인도하던 32명 중의 하나였다. 슈베르트도 그중의 하나였다. 라블라셰는 베토벤 추모음악회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불렀다. 라블라셰는 1835년 벨리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라크리모사를 불렀다. 1849년 파리에서 쇼팽의 장례식이 거행될 때에도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불렀다. 라블라셰는 1858년 고향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파리의 메송 라휘트(Maison Lafitte)에 안장되었다. 라블라셰는 1813년, 18세 때에 역시 성악가인 테레사 피노티(Teresa Pinotti)와 결혼하여 자녀를 13명이나 두었다. 그중에서 프레데릭 라블라셰는 성악가가 되었고 큰 딸인 프란체스카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지기스몬트 탈버그(Sigismond Thalberg)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망내딸인 테레사는 오페라 성악가인 한스 폰 로키탄스키(Hans von Rokitansky)와 결혼하였다. 영국 출신의 헐리우드 배우인 스튜어트 그렌저(Stewart Granger)는 라블라셰의 고손자가 된다.

 

영화배우 스튜어트 그렌저는 라블라셰의 고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