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말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2세

정준극 2008. 3. 7. 18:54

요한 슈트라우스 2(1825-1899)의 발자취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기념상 상단의 포아가이게 모습


'왈츠 킹'이라고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는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비엔나의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는 오스트리아의 비공식 국가로 간주되고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박쥐'(Die Fledermaus)는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비엔나 오페레타이다. 비엔나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해도 공연 스케줄을 잘 보고 있다가 폭스오퍼(Volksoper)에 가서 진실로 비엔나적인 '박쥐'를 한번이라도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비엔나에서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존경한다면 루트를 잘 계획한 후에 하루를 내서 비엔나에서 그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새삼스럽지만 감회에 젖어 있을 필요가 있다.

 

■ 태어난 집: 7구 노이바우의 레르헨펠더슈트라쎄(Lerchenfelderstrasse) 15번지에 있었다. 당시에는 비엔나 교외인 장크트 울리히(St Ulrich)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슈트라임은 1825년에 비엔나의 리히텐탈(Lichtenthal) 교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후 장크트 울리히에 집을 구하여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 집은 1890년에 너무 노후하여 철거되었다. 그후 새로 건물이 들어섰으며 그것이 현재의 레르헨펠더슈트라쎄 15번지이다. 현재의 건물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비엔나 남성합창연맹이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레르헨펠더슈트라쎄는 라트하우스와 폭스테아터의 사이에 있는 길이다. 지하철 U2를 타고 레르헨펠더슈트라쎄에서 내리면 금방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태어난 장소라는 기념 명판.

 

■ 처음 작곡한 집: 여관을 경영했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외할아버지는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당시 비엔나 교외인 잘만스도르프(Salmannsdorf)에 여름 별장을 하나 샀다. 슈트라우스 가족은 이 집에서 1829년부터 1836년까지 여름이면 가서 살았다. 어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7살 때에 이 집에서 첫 왈츠를 피아노를 치며 즉흥적으로 작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첫 생각'(Erster Gedanke: First Thought)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집은 현재 19구 되블링의 드라이마르크슈타인가쎄(Dreimarksteingasse) 13번지이다. 어린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처음 작곡한 왈츠인 '첫 생각'은 나중에 그의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가 자선목적으로 출판했다.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Döblinger Hauptstrasse)에서 35A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종점인 하메아우스슈트라쎄(Hameausstrasse)에서 내리면 찾을수 있다

 

어린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처음 작곡한 되블링의 집

 

■ 쇼텐슈티프트 김나지움(Schottenstift Gymnasium):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836년부터 다닌 고등학교이다. 이 김나지움은 일찍이 1775년에 제국김나지움으로 설립되었다가 1807년에 쇼텐수도원의 베네딕트 수도승들이 운영을 맡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이 고등학교는 그후 제국폴리테크니크학원(k.k. Polytechnische Institute)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현재는 비엔나기술대학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41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폴리테크니크학원의 상업학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으나 2년후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수업시간에 노래나 부르거나 작곡을 했기 때문이었다. 폴리테크니크학원은 1구 프라이융(Freyung)의 쇼텐슈티프트에 부속되어 있었던 건물이었다. 프라이융 6번지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태어난 집이라고 한다. 바로 쇼텐슈티프트 김나지움의 옆에 붙어 있는 건물이었다.  

 

쇼텐슈티프트 김나지움이 있었던 건물. 프라이융에 있다

                   

■ 페르디난트 돔마이어 카지노(Ferdinand Dommayer Casino):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한 것은 1844년 키르헤 암 호프(Kirche am Hof)에서 그라두알레(Graduale)를 연주한 것이었다. 그후 그는 자기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페르디난트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연주했다. 페르디난트 돔마이어는 1833년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우아한 이 건물을 지었다. 당시의 청중 중에는 왕족들과 비엔나의 부유층들이 있어서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그로부터 비엔나에는 슈트라우스 아버지의 오케스트라와 슈트라우스 아들의 오케스트라가 마치 경쟁이나 하는듯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저널리스트인 프란츠 비스트(Franz Wiest)라는 사람은 돔마이어에서 슈트라우스 아들의 연주를 보고서 '구테 나하느 란너, 구테 나하트 슈트라우스 파터, 구텐 모르겐 슈트라우스 존'(Gute nacht Lanner, Gute nacht Strauss Vater, Guten morgen Strauss Sohn)이라는 유머스러우면서도 예언적인 말을 남겼다. 오늘날 이 카지노는 13구 히칭의 히칭거 하우프트슈트라쎄(Hietzinger Hauptstrasse) 10-14에 있는  파르크호텔 쇤브룬(Parkhotel Schönbrunn)이다.

 

쇤브룬 파르크호텔의 연회장

페르디난트 돔마이어 카지노. 현재는 파르크호텔 쇤브룬.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처음으로 자기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연주했던 곳이다.

 

19구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Döblinger Hauptstrasse) 76번지: 쇼텐토르에서 37번 전차를 타고 찾아 갈수 있다. 최거니츠 카지노(Im Kasino Zögernitz)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가 악단을 만들어 연주활동을 했던 곳이며 나중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역시 악단을 만들어 연주했던 곳이다. 그런 사연을 적은 기념명판이 걸려 있다. 현재는 호텔 최거니츠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는 1849년 9월 25일 성홍렬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최고의 작품은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는 수많은 시민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되블링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옆에는 요제프 란너의 묘지가 있다. 그해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오케스트라를 자기의 오케스트라와 합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아버지가 처음 악단을 만들어 연주했던 최거니츠 카지노가 있던 곳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도 악단을 만들어 이곳에서 연주했다.  

 

■ 첫번째 결혼식을 올린 슈테판 성당: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62년 8월 27일 예티(Jetty)라는 애칭의 헨리에타 트레프즈(Henrietta Treffz)와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티는 16년 후인 1878년 4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예티가 세상을 떠난지 한달 20여일 후인 5월 28일에 '릴리'라는 애칭의 여배우인 안젤리카 디트리히(Angelica Dittrich)와 재혼하였다. 릴리는 폴란드의 브레슬라우 출신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릴리와 결혼식을 올린 슈테판 성당에서 카펠레 장소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캐터린 채플일 것이라는 얘기다.

 

■ 요한 슈트라우스 보눙: 2구 프라터슈트라쎄(Praterstrasse) 54번지: 비엔나에 있는 유일한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관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소프라노인 헨리에타 트레프즈(예티)와 결혼하고 나서 1863년부터 1870년까지 7년을 살았던 집이다. 그는 1867년 이 집에서 오스트리아 비공식 국가라고 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왈츠를 작곡했다. 기념관에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쓰던 여러 가구, 초상화, 악기, 악보, 메달, 훈장 등이 보존되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가장 사랑했던 바이올린은 현재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악기박물관(Musikinstrumenten-Sammlung)에 전시되어 있다. 요셉 란너의 바이올린도 전시되어 있다.  전에는 이 기념관의 아랫층에 맥도날드가 있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살던 집의 아랫층에 미국의 맥도날드 가게가 들어선데 대하여 매우 속상해 했었다. 특히 기념관을 지키는 할머니가 그랬었다. 결국 맥도날드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은 곳에 있어서인지 또는 비엔나 시민들의 눈총이 달갑지 않아서였는지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대신 다른 가게가 들어왔다. 이 건물의 길거리에 면한 곳에는 클래시컬한 비엔나 식당이 있다. '4분의 3박자'(3/4 TAKT)라는 이름의 카페 레스토랑이다. 왈츠라는 의미이다. 지하철 U1 네스트로이플라츠에서 내려 프라터슈트라쎄로 빠져 나와 노르드반(북부역)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찾을수 있다.

 

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 건물의 2층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기념관이며 아래층은 4분의 3박자 식당이다. 이 집에서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했다. 현재는 맥도날드가 문을 닫았다.

                        

- 1구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2번지: 캐른트너슈트라쎄에서 징거슈트라쎄로 들어가는 모퉁이 집인 이 곳에서 요한 슈트라우스가 한때 살았다. 지금은 상점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볼수 없다. 그러므로 특별히 찾아가 볼 명분이 부족하다.

 

징거슈트라쎄

 

■ 오페레타 '박쥐'의 집: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 집에서 1870-78년 동안 살았다. 그는 이 집에서 1874년 오페라 박쥐’(Der Fledermaus) 등 여러 작품을 썼다. 그러한 사연을 적은 기념명판이 걸려 있다. 13구 막싱거 슈트라쎄(Maxinger Strasse) 18번지에 있다. 쇤브룬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하철 U4를 타고 히칭(Hietzing)에서 내려 막싱거 슈트라쎄로 내려 가다가 있는 집이다. 오페레타 '박쥐'는 1874년 4월 5일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박쥐'를 작곡한 막싱거가쎄의 저택

 

- 히칭의 돔마이어 카지노는 한번쯤 들여다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 카지노(예전에는 무도회도 열렸음)에서 연주했다. 지금은 카페이다. 카페 앞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념상이 있다. 1999년, 요한 슈트라우스 서거 100 주년을 기념하여 설치되었다.

 

카페 돔마이어 앞에 설치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기념조형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100 주년을 기념하여 설치되었다.

 

- 쇠나우(Schönau) 마을: 비엔나에서 바덴 방향으로 1시간 이상 내려가면 쇠나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에 요한 슈트라우스가 1880년부터 여름별장으로 사용하던 빌라가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여름에 이 빌라에 머물면서 오페레타 베니스의 밤’(Eine Nacht in Venedig) 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바드 쇠나우

 

■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곳: 4구 뷔덴의 요한 슈트라우스가쎄(Johann Strasuss Gasse) 4번지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1899 6 3일 세상을 떠난 집이다. 당시에는 이겔가쎄(Igelgasse) 4번지였다. 옛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 들어 섰기 때문에 당시의 집 모습은 찾아 볼수 없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집으로 1880년초에 부인 릴리와 함께 이사온 것으로 생각된다. 릴리는 1882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집에서 있었던 어떤 모임에서 세번째 부인이 되는 아델레를 만났고 4년 후인 1886년에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1887년 8월 15일에 코부르크(Coburg)에서 결혼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아델레와의 결혼을 위해 개신교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작손 시민이 되었다. 이겔가쎄라는 명칭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99년에 그를 추모하여 요한 슈트라우스 가쎄로 변경되었다. 이 저택에서 당시 비엔나의 정상급 음악인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 중에는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칼 골드마크 등이며 푸치니도 이 집을 방문했었다. 이 저택은 전쟁 중인 1944년 폭격을 맞아 전파되었고 그후 새로운 보눙(아파트)이 들어섰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집이라는 것은 이 새로운 건물의 벽면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악보 첫 소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알수 있게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이 집에서 1899년 6월 3일 서거했다는 내용의 명판

요한 슈트라우스 가쎄 4번지 건물의 벽에 그려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첫 소절.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 집이 있었다.

 

- 슈타트파르크(Stadtpark):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아들)의 황금 기념상이 있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이다. 원래 만들어 놓았을 때는 흰색이었으나 나중에 '왈츠의 황제'라는 의미에서 황금색을 칠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 공원에 있는 쿠어살롱(Kursalon)에서 왈츠를 연주했다. 지금도 매일 밤마다 관광객 대상의 왈츠 연주회가 열린다.

 

 

비엔나 시립공원(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황금 기념상 

      

-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음악가 묘역(32구역)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묘지가 있다. 세번째 부인 아델레와 합장되어 있다.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아버지, 동생인 에두아르드와 요셉이 모두 안장되어 있다. 음악가 묘역 중심지(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뒷편 서클에는 휴고 볼프, 칼 밀뢰커, 요한 슈트라우스의 가족들, 프란츠 주페 등의 묘지가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묘비는 그의 생애를 표현한 듯하다. 아기 천사들(Cherubs)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날아다니는 박쥐 한마리도 있다.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묘지와 그 옆의 브람스 묘비

 

- 슈타츠오퍼(Staatsoper: 국립오페라극장)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1892년 1월 1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일한 오페라인 '기사 파즈만'(Ritter Pasman)이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슈타츠오퍼는 매년 12월 31일 제야의 밤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를 공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1869년에 오픈한 슈타츠오퍼는 개관기념으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공연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의 '박쥐' 무대

 

-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모두 18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박쥐'를 포함한 13편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들은 다음과 같다.

 

* 1871. 2. 10    Indigo und die vierzig Rauber(인디고와 40인의 도적)

* 1873. 3. 1     Der Karnabal in Rom(로마의 카니발)

* 1874. 4. 5     Der Fledermaus(박쥐)

* 1875. 2. 27    Cagliostro in Wien(비엔나의 칼리오스트로)

* 1878. 12. 18   Blindekuh(눈먼 암소)

* 1880. 10. 1    Das Spitzentuch der Konigin(왕비의 손수건)

* 1881. 11. 25   Der lustige Krieg(유쾌한 전쟁)

* 1885. 10. 24   Der Zigeunerbaron(집시 남작)

* 1887. 12. 17   Simplicus(바보)

* 1893. 1. 10     Furstin Ninetta(니네타 대공비)

* 1894. 10. 12   Jabuka(야부카)

* 1895. 12. 4     Waldmeister(삼림관)

* 1897. 3. 13     Die Goettin der Vernunft(이성의 여신: 분별있는 여신)

 

테아터 안 데어 빈의 구정문. 밀뢰커가쎄 골목에 있다. 상단의 조각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새잡이 파가게노와 세 소년의 모습이다. 1791년 9월 마술피리의 초연은 뷔덴극장에서 있었다. 그때 대본을 쓰고 파파게노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사람이 에마누엘 쉬카네더였다. 쉬카네더는 나중에 뷔덴극장을 인수했으며 더 나중에는 지금의 테아터 안 데어 빈을 인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