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정준극 2008. 3. 11. 15:34

 콘체르토 그로소의 원조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1642-1682)는 17세기 바로크 중기에 이탈리아 작곡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아쿠아 디 네피라는 광천수로 유명한 비테르노 현의 네피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의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귀족이나 왕족에게 속해서 작곡생활을 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작곡활동을 하였다. 말하자면 프리랜서였다. 하지만 작곡을 해달라고 의뢰하면 기꺼운 마음으로 작곡을 했다. 그는 활달하여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과 교분을 갖고 지냈다. 그런 덕분에 오페라의 대본과 노래의 가사를 비교적 쉽게 마련할수 있었다. 그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생산했다. 약 3백편 이상이나 작곡한 보기드믄 다작의 작곡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는 투스카니의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것,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20세의 젊은 나이로 이미 작곡가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이다. 그는 1667년에 로마로 자리를 옮겨서 스웨덴의 왕비인 크리스티나를 위해 주로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오페라의 제작에 관여하였다. 네편의 오페라의 공연을 직접 관여하였는데 두 편은 프란체스코 카발리의 작품이었고 두 편은 안토니오 체스티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당대를 빛낸 작곡가여서 젊은 스트라델라가 이들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은 일이었다. 스트라델라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다보니 여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방종한 생활을 시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스트라델라는 당시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인 카를로 암브로지오 로나티(Carlo Ambrogio Lonathi)와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로나티는 작곡도 했고 노래도 불렀던 재능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두사람은 합심하여서 교황청으로부터 돈을 사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 스트라델라는 로마에서 도망쳐서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이제는 사람들이 잊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에 로마로 다시 돌아갔다. 사실 돈을 사기로 가로채려던 것은 별것도 아닌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이었다. 스트라델라가 악명이 높아진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애박사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여자 관계가 아주 복잡했다. 3중, 4중 생활은 머리 좋은 사람만이 하는 법인데 스트라델라는 그만큼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러다보니 스트라델라에게는 적이 많이 생겼다. 스트라델라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 중에는 로마에서 권세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언제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스트라델라는 일단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로마를 떠나 베니스로 갔다. 베니스에서는 다행히 지체 높은 알비세 콘타리니라는 귀족의 수하에서 일할수 있었다. 하는 일이란 콘타리니의 정부인 아네세 반 우펠레라는 여인의 개인 음악교사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곧이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만일 콘타리니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면 죽음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두 사람은 도저히 베니스에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야반도주하였다. 이번에는 토리노로 갔다. 다행히 토리노의 섭정인 마리 장느 바티스트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콘타리니는 나쁘게 말해서 두 년놈이, 좋게 말해서 두 연인이 토리노에 있다는 것을 알고 토리노로 찾아왔다. 콘타리니는 토리노의 대주교에게 두 사람이 결혼하도록 만들던지 그렇지 않으면 우펠레는 수녀원으로 들어가야 할것'이라면서 조치를 취하도록 강요했다.


알비세 콘타리니가 스트라델라에게 자기의 정부인 아네세 우펠레를 소개하고 있다.


우펠레는 후환이 두려워서 수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스트라델라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다고 우펠레를 설득하여서 결국 몇 달 후에 수녀원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스트라델라는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녀원을 나왔다. 그때 뒤에서 두명의 암살자들이 스트라델라를 공격하여 칼로 찔렀다. 암살자들은 스트라델라가 쓰러지자 죽은 것으로 믿고 스트라델라를 길거리에 내버려 둔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스트라델라는 다행히 죽지 않았다. 콘타리니가 암살자들을 고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암살자 두 사람은 프랑스 대사에게 도피처를 구하였다. 스트라델라를 돌보아주고 있던 토리노의 섭정인 사보이의 마리 장느 바티스트는 당장 이 사건에 대하여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처리를 요청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와 사보이 왕가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스트라델라는 아무래도 두려워서 이듬해(1678)에 제노아로 피신하였다. 스트라델라는 제노아에서 어떤 귀족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아 작곡을 하였고 이어 팔코니 극장으로부터도 오페라 의뢰를 받았다. 사람들은 스트라델라가 '이젠 착실하게 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제버릇 무엇 못 준다고 스트라델라는 제노아에서 또 다시 천부의 재능을 살려서 여러 여인들을 울고 울리었다. 그러다보니 또 다시 적들을 만들었다. 어느날 스트라델라가 피이짜 방키를 걷고 있는데 누가 다가와서 다짜고짜로 칼로 찌르는 바람에 이번에는 살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로멜리니 가문의 어떤 귀족이 자기 아내가 스트라델라와 놀아나는 바람에 분노하여서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트라델라를 죽인 암살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스트라델라의 시신은 산타 마리아 델레 비네(Santa Maria delle Vigne)교회에 안장되었다.

 

오페라 일 트레스폴로 투토레의 한 장면


스트라델라는 당시에 대단히 영향력있는 작곡가였다. 물론 그의 명성은 그의 사생활로 인하여 그림자가 드려졌고 또한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코렐리나 비발디 때문에 가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서양음악사에 길이 남아 있는 것이 되었다. 스트라델라의 음악은 후세에 여러 작곡가들이 참고로 삼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헨델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에서 스트라델라의 음악을 모방하였다. 스트라델라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도 콘체르토 그로소를 처음 시작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 후에 코렐리가 자기의 Op 6를 출판하면서 콘체르토 그로스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코렐리가 콘체르토 그로소의 원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트라델라였다. 스트라델라는 그의 소나테 디 비올레(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에서 콘체르트 그로소 형식을 분명히 사용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아마도 코렐리가 스트라델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스트라델라는 최소한 여섯 편의 바로크 오페라를 썼다. 오늘날 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는 '가정교사 트레스폴로'(Il Trespolo tutore)이다. 이밖에도 La prosperita di Elio Seiano, Non e padre essendo re 가 음반으로 나와 있다. 스트라델라는 170 여편의 칸타타를 작곡했고 오라토리오는 여섯 편을 작곡했다. 그는 별도로 27편의 기악곡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이 현악기와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작품으로 교회 소나타(sonata di chiesa) 형식이다. 칸타타 중에서 두 곡은 토리노의 섭정인 마리 장느 바티스트에게 헌정한 것이다. 스트라델라의 컬러풀한 생활과 그의 비참한 죽음은 미안하지만 오페라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루이 니더마이어(Louis Niedermeyer)는 '스트라델라'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만들었고 독일의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우(Friedrich von Flotow)는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미국의 소설가인 마리온 크로포드(Marion Crawford)는 스트라델라 연애사건, 특히 베니스에서의 도피사건을 소재로 1909년에 '스트라델라'라는 로맨틱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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