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룩과의 전쟁 상대역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i: Nicolai Piccini)
푸치니라고 하면 누구나 잘 알지만 피치니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니콜라이 피치니(Nicolo Piccini 또는 Nicolai Piccini: 1728-1800)는 18세기 말, 이탈리아 오페라의 세계화를 위해 커다란 기여를 한 대단한 작곡가이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니콜로 피치니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글룩과의 전쟁’ 때문이다. ‘글룩-피치니 전쟁’은 1770년대 후반 파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글룩의 작품이 뛰어난지 또는 피치니의 작품이 뛰어난지를 가리는 사상 초유의 오페라 경연대회였다. 피치니는 훌륭한 작곡가였으나 그의 명성이 올라갈 쯤 되면 어찌된 일인지 반드시 더 인기를 끄는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곤 했다. 글룩과의 라이벌 관계는 둘째 치더라도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제자였던 안포씨(Anfossi)의 인기 때문에 그늘에 가려져 있어야 했고 말년에 인기가 회복되려는 시점에서는 사키니(Sacchini)가 등장하는 바람에 그늘에 가려있어야 했다. 피치니는 정치적으로도 곤란을 겪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감동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가서 시민혁명사상을 주장하다가 그를 후원하던 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피치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 피치니는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피치니는 14세 때에 나폴리의 산오노프리오(San onofrio)음악원에 들어가 12년 동안 음악의 여러 장르를 공부했다. 26세 때에 음악원을 떠난 그는 곧바로 나폴리공국의 궁정에 고용되어 첫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1755년 나폴리에서 초연된 Le Donne dispettose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사람들은 그 성공을 환상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몇 해후 그는 로마로부터 Alessandro nelle Indie를 작곡해 달라는 청탁받았다. 이 역시 대성공이었다. 2년후에는 La Cecchina라는 코믹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코믹 오페라는 로마와 다른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공연되었다. 그 정도로 인기를 차지했다. La Cecchina(일명 마음씨 착한 아가씨)에 대한 소문은 멀리 중국에 까지 퍼졌다. 그는 저 멀리 중국 황제(청의 건륭황제)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에 가서 황제를 위한 특별 공연을 가졌다.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1761년, 각각 다른 6편의 오페라가 이탈리아의 각각 다른 도시에서 동시에 공연된 것만 보아도 알수있다. 그로부터 몇년동안 피치니의 명성은 세계 다른 어느 작곡가보다 앞서 있었다.
그의 위치는 1773년 제자였던 안포씨(Anfossi)가 Incognita perseguitana라는 오페라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자 곧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안포씨는 피치니보다 한 살 위이지만 늦게 작곡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년배나 다름없는 피치니에게서 작곡기법을 배웠다. 안포씨의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상대적으로 피치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져갔다. 피치니는 그러한 로마의 인심에 질려서 다시는 로마의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결국 나폴리로 돌아간 그는 사람들의 간청에 못이겨 몇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리에서도 그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I Viaggiator라는 오페라 부파만이 네 시즌에 걸쳐 연속 공연될 정도였다. 그는 38세 때에 파리로 향했다. 그 동안 몇차례 초청이 있었지만 더 이상 미룰수가 없어서 결국 파리행을 단행한 것이다.
파리에서의 첫 오페라는 Roland(롤란드)였다. Roland는 파리 오페라극장이 글룩에게도 의뢰하여 얼마전 공연했던 작품이었다. 파리의 음악계는 심심하던 판에 같은 제목의 두 오페라 중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절반은 피치니 지지자들(Piccinists)이었고 절반은 글룩 지지자들(Gluckists)이었다. 논쟁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의 음악계는 완전히 둘로 갈라져서 그저 밥만 먹고 나면 그 얘기였다. 이 논쟁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저 유명한 글룩과 피치니의 오페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약삭빠른 파리의 오페라 극장은 ‘글룩 대 피치니’를 놓고 매일 논쟁이 벌어진다면 잘만 하면 돈벌이가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극장은 두 사람중 진짜 누구의 작품이 더 훌륭한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상금을 내걸고 콘테스트를 열었다. 두 사람에게 Iphigénie en Tauride(터리드의 이피게니)의 대본을 주고 시간을 정하여 작곡을 완성토록 의뢰했다. 피치니는 자기 작품이 먼저 공연되도록 해야 콘테스트에 참가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피치니 지지자들이 ‘나중에 공연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수 있다’고 설득하는 바람에 글룩의 작품부터 공연한다는 조건으로 선전포고를 받아들였다. 글룩이 쓴 작품은 위대한 걸작이었다. 물론 피치니의 작품도 훌륭했지만 글룩의 작품이 먼저 공연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반면, 나중에 공연된 피치니의 작품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글룩이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다. 이로부터 피치니의 명성은 평생을 두고 고통을 받았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이 글룩은 알아도 ‘피치니? 뭐가 삐쳤나?’라고 말하면서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글룩-피치나 오페라전쟁의 여파이다.
그로부터 몇 년후 글룩이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비엔나로 돌아가자 파리에 남아있던 피치니의 명성은 잠시 올라가는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새로운 라이벌 사키니가 등장하는 바람에 또다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피치니로서는 이들과 의도적으로 라이벌 관계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럴 의사도 전혀 없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극성맞은 팬들 때문에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고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실제로 글룩이 세상을 떠나자 피치니는 ‘그는 모든 무대에 빚을 지고 떠났다.’고 하면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피치니는 나폴리로 되돌아 왔다. 나폴리 공국은 그를 따듯하게 환영했다. 오페라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그의 명성이 되살아 나는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잠시뿐, 프랑스 혁명사상에 물들어 ‘프로레타리아여 일어나라!’라고 몇 차례 외쳤고 한발 나아가 자기 딸을 그런 사상을 가진 청년과 결혼시킨 것이 귀족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결국 몇 년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798년 베니스로부터 오페라 두편의 작곡을 의뢰받자 이를 핑계로 나폴리를 빠져나와 베니스로 가는 척 하면서 곧 바로 프랑스로 발길을 돌려 세상 떠날 때까지 살았다. 그는 파리에서 생의 마지막 영광을 잠시 맛볼수 있었다. 파리 음악원의 음악감독을 맡아 많지는 않지만 연금을 받으며 살아갈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쯤해서 피치니의 건강은 무척 나빠졌다. 그동안의 마음의 상처들과 오랜 객지 생활의 여파가 겹쳤던 같았다. 그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피를 자주 흘렸다. 그리하여 파리에서 생의 마지막 2년을 지낸후 파씨(Passy)에서 세상을 떠났다. 피치니는 음악역사에 있어서 독-이 오페라 전쟁의 주역이었으며 이 전쟁의 여파로 잠시나마 이탈리아 오페라에 패배를 안겨준 인물로 기억될수 있다.
피치니의 대표작인 '라 체키나'의 한 장면
피치니의 오페라 수첩
● Le donne dispettose(1754) ● Zenobia(1756) ● I viaggiatori(1775) ● Caio Mario(1757) ● La Cecchina(1760 로마 Teatro delle Dame) ● Le vicende della sorte(1761 로마) ● La buona figliuola maritata(1761 볼로냐) ● Il Cavaliere per Amore(1762 나폴리) ● Le Contadine bizzare(1763 베니스) ● Gli Stravaganti(1764 로마) ● Il Barone di Torreforte(1765 로마) ● La Pescatrici(1766 로마) ● Il gran Cid(1766 나폴리) ● Le finte Gemelle(1772 나폴리) ● Alessandro nell Indie(1774 나폴리) ● Roland(1778 파리 Grand Opéra) ● Atys(1780) ● Iphigénie en Tauride(1781 파리 Grand Opéra) ● Didon(1783 파리) ● Le faux Lord(1783 파리) ● Penelope(1785 퐁텐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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