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의 잘못된 만남
안토니오 살리에리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영화가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스토리이지만 실제로 영화의 주인공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이다. 영화의 내용은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비엔나에서 함께 활동했던 살리에리가 천부적 재능의 모차르트를 시기한 나머지 젊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내용이다. 러시아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98년 Mozart i Salieri(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역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음독자살하게 했다는 줄거리이다. 살리에리는 누구인가? 정말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어떤 오페라를 남겼는가? 모차르트와의 관계는 무엇이었는가?
살리에리는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아래 있었던 만투아공국의 레냐뇨(Legnan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가서 활동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레냐노라고 하면 베르디의 오페라 ‘레냐노의 전투’가 생각날 것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6년 위이다. 비엔나에서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사람이다. 살리에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시 바이올린의 귀재로 알려진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에게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어린 시절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는 아버지가 밥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려 숨을 쉬지 못하여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영화일 뿐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요람지인 베니스로 가서 페스체티(Pescetti) 문하에서 그 어려운 화성법등을 공부했다. 베니스에서 레오폴드 가쓰만(Leopold Gassmann)을 만난 것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이었다. 가쓰만은 합스부르크 황제인 프란츠2세 치하의 궁정 작곡가였다. 가쓰만은 살리에리를 비엔나 궁정으로 초청하여 작곡 공부를 본격적으로 할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살리에리가 16세 때였다. 비엔나의 궁정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내기를 8년, 마침 가쓰만이 세상을 떠나자 프란츠2세 황제는 24세의 약관인 살리에리를 궁정작곡가로 임명하였고 몇 년후에는 궁정교회 음악감독의 직위를 주었다.
살리에리는 비엔나에서 지내는 동안 특히 오페라 작곡가로서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 그의 오페라가 초연되는 날에는 대체로 황제가 직접 참석할 정도였다. 그는 모두 4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784년, 그가 34세 때에 내 놓은 Les Danaides였다. 이 오페라는 실상 살리에리가 무명일 때에 작곡한 것으로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 위해 글룩이 작곡한 것처럼 소개하여 공연된 일이 있다. 당시에는 지적재산권 문제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대단한 살리에리였다. 38세 때에 내놓은 타라레(Tarare)라는 오페라도 인기를 끌었다. 살리에리의 사회적, 음악적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는 하이든과 교분을 맺었으며 한창 젊은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한때 체르니(Czerny)와 훔멜(Hummel)을 가르치기도 했다. 모차르트와는 실제로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줄 정도로 모차르트 식구들과는 가깝게 지냈다. 살리에리는 75세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보다 36년을 더 살았다. 그는 비엔나 중앙묘지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아우스, 폰 주페 등과 함께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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