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코믹 오페라 대가
도메니코 치마로사
도메니코 치마로사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던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1749-1801)는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되어 오갈데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치마로사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어느 신부님이 어린 그를 나폴리의 어떤 음악원에서 무료로 공부하게 해 주었다. 이 음악원에서 그는 성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개발하였다. 그리하여 30대에 이미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코믹 오페라 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3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러시아의 어느 귀족이 그를 러시아로 초청하여 4년동안 카타리나 여제의 궁정음악장을 지냈다. 1791년은 모차르트가 쓸쓸히 세상을 떠난 해였다. 바로 그 이듬해에 치마로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레오폴드2세 황제의 초청을 받아 비엔나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인 Il matrimonio segreto(비밀 결혼)를 작곡했다.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공화제 운동에 관련되어 잠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얼마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영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비밀결혼'. 현대적 연출
도메니코 치마로사는 1749년 12월 17일 나폴리왕국의 아베르사(Aversa)에서 태어났다. 아베르사는 오늘날 카세르타주에 속한 도시이다. 치마로사는 나폴리학파에 속한 작곡가이다. 그는 생전에 80편 이상이나 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는 1792년에 처음 발표된 '비밀 결혼'(Il matrimonio segreto)이다. 치마로사는 또한 수많은 세속적인 성격과 종교적인 성격의 기악곡을 작곡했다. 치마로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는 치마로사만은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대도시인 나폴리로 이사를 가고 나폴리에 있는 어떤 수도원이 운영하는 무료 학교에 입학시켰다.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인 폴카노 신부(Padre Polcano)는 어린 치마로사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파드레 폴카노는 치마로사에게 음악기초를 가르쳤고 또한 이탈리아의 고대역사 및 근대역사를 가르쳤다. 치마로사는 파드레 폴카노의 주선으로 나폴리에 있는 음악원인 산타 마리아 디 로레토(Santa Maria di Loreto)에 들어 갈수 있었다. 치마로사는 이곳에서 11년이나 머물면서 전통적인 이탈리아 학파에 속한 니콜로 피치니(Nicolo Piccinni), 안토니오 사키니(Antonio Sacchini) 등에게서 전문적인 음악지식을 교육받았다.
치마로사는 23세 때에 Le stravaganze del conte라는 오페라 부파를 발표함으로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이 오페라 부파는 1772년 나폴리의 테아트로 델 휘오렌티니()에서 초연되었다. 상당한 호평을 받은 공연이었다. 치마로사는 이어 그 해에 Le pazzie di Stelladaure e di Zoroastro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일상적인 사건으로서 웃기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 일종의 익살오페라였다. 이 작품도 성공이었다. 젊은 작곡가인 치마로사의 이름은 단번에 전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치마로사는 1774년에 로마로부터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역시 오페라 부파인 L'italiana in Londra(런던의 이탈리아여인)이었다. 이후 13년 동안 치마로사는 필요한대로 로마에도 있고 나폴리에도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 잠시잠시 지내면서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1784년부터 3년 동안은 플로렌스에서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오페라 뿐만 아니라 칸타타, 기타 여러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아마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 기간에 그가 완성한 오페라로서는 Cajo Mario, Assalone, La giuditta, Il sacrificio d'Abramo, Il convito di pietra, La ballerina amante 등이다. La ballerina amante는 베니스에서 처음 공연된 코믹 오페라로서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세편의 성서오페라를 작곡했다.
도메니코 치마로사
치마로사는 1787년에 제정러시아의 카테리나 2세 여왕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았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동안 머무르면서 역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대체로 어떤 기념계기를 위해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한 작품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지만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Messa da Requiem in G minor 를 작곡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그 주재 프랑스 대사의 부인이 서거했기 때문에 부탁을 받고 작곡한 것이다. 대단히 뛰어난 미사곡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92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2세의 초청을 받고 비엔나로 갔다. 치마로사는 비엔나에서 그의 걸작 오페라 부파인 '비밀 결혼'을 작곡했다. 대성공이었다. 극장은 연일 만원사례였다. 훗날 베르디는 '비밀 결혼'을 오페라 부파의 모델이라면서 높이 평가했다. 이듬해인 1793년 그는 나폴리로 돌아왔다. 역시 '비밀 결혼'은 대환영을 받았다. 그는 나폴리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가 Le astuzie femminili였다.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비밀 결혼'의 한 장면
그러한 치마로사였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에니미도 생가고 라이발도 생기는 법인데 치마로사의 경우에는 라이발들이 의외로 많았다. 해묵은 라이발은 조반니 파이시엘로()였다. 치마로사는 프랑스군이 니폴리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 프랑스공화국 편에 서서 자유주의 주장에 참여하였다. 그러다다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자 치마로사는 공화제를 지지했다는 죄목으로 다른 여러 정치범들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치마로서의 친구들 중에서 사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행하게도 치마로사의 작품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치마로사는 중형을 받지 않고 그저 나폴리에서 추방 당하는 선고를 받았다. 치마로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비록 날씨는 춥지만 마음 편하게 지낼 요량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서 베니스에서 머물다가 1801년 1월 11일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장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치마로사가 라이발의 미움을 받아 독살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을 했지만 의학적으로는 독살의 증후를 발결할수 없었다. 치마로사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도 작곡에 집중하였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Artemizia는 미완성으로 남을수 밖에 없었다.
치마로사의 오페라 수첩
● I tre amanti(1777) ● Giannina e Barnardone(1781) ● Il pittor parigino(1781) ● I due baroni di Rocca Azzurra(1783) ● Il marito disperato(1786) ● Le trame deluse(Li raggiri scovati. 1786) ● Il fanatico burlato(1787) ● Chi dell'altrui si veste presto si spoglia(1790) ● Il maestro di cappella(1790) ● Il matrimonio segreto(1792) ● Le astuzie femminili(1794) ● Gli Orazi e I Curiazi(1797) ● L'amor rende sagace(1893)...
'세계의 오페라 작곡가 > 이탈리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진실 게임 (0) | 2008.03.11 |
---|---|
안토니오 살리에리 (0) | 2008.03.11 |
루이지 보케리니 (0) | 2008.03.11 |
조반니 파이시엘리(Giovanni Paisielli) (0) | 2008.03.11 |
조반니 시모네 마이르(Giovanni Simone Mayr) (0) | 200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