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 이탈리아 제2의 국가

정준극 2008. 3. 11. 16:01

● 이탈리아 제2의 국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런 그에게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 Merelli)였다. 메렐리는 스칼라극장의 제작자였다. 메렐리는 친구 베르디에게 간청했다. ‘여보게 친구, 오페라를 한번 작곡해보게나! 제발!’... 이렇게 하여 1842년, 베르디가 29세 때에 나부코(Nabucco)가 완성되었다. 초연을 위한 리허설 시간이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인 Va, pensiero(날아라! 금 빛 날개를 타고)가 연습에 들어가자마자 주위는 일순 조용해 졌다. 무대 작업을 하던 인부들, 청소를 하던 사람들, 심지어 지붕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일손을 놓고 이 숭고한 멜로디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합창곡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일제히 열광적으로 브라보를 외쳐댔다. 이 합창곡에는 분명히 무언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강한 힘이 있었다. 나부코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평론가들은 젊은 베르디의 나부코에 대하여 한없는 찬사를 보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강대국인 합스부르크제국의 오스트리아에 점거 당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나부코에서 보여준 ‘히브리 노예(포로)들의 합창’은 독립과 자유를 열망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후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제2의 이탈리아 국가로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나부코'

오페라 작곡가에게 있어서 좋은 텍스트(스토리)를 택하는 것은 오페라의 성패를 가름하는 관건이다. 베르디는 좋은 스토리를 택하였다. 세계적 문호 빅토르 위고의 ‘일락의 왕’(나중에 ‘리골레토’라고 제목을 바꾸었음)과 알렉산더 뒤마의 ‘버려진 여인’(나중에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이 되었음)을 소재로 한 오페라는 베르디의 명성을 최대로 높여준 작품이 되었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성공을 거둔 배경은 사실적이면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감성을 있는대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사랑, 탐욕, 질투, 욕망, 배신....여기에 빛나고 영광스러운 음악! 이것이야 말로 베르디의 오페라를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 세계에 떨치게 한 배경이었다. 베르디의 음악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감미롭다. 한마디로 감동적이다. 그의 오페라는 들을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지는 곡들로 넘쳐있다.


베르디는 57세가 되던 해쯤에 이미 세계적 작곡가로서 명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베르디에게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편지 봉투에 ‘이탈리아 베르디선생’이라고만 적으면 베르디에게 배달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집트의 총독이 베르디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하였다. 베르디는 이 작품을 생애 최대의 작품으로 만든후 은퇴하여 고향 마을로 돌아가 포도밭을 가꾸고 송아지를 기르는 평범한 농부로 살려고 했다. Aida(아이다)는 과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최대의 걸작이었다. 이 오페라에는 사랑, 용기, 충성, 애국심 등 베르디가 추구하는 모든 요소들이 내포되어있다. 아이다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율, 열정적인 멜로디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다는 스펙터클하다.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이 동원되며 무대장치만 하더라도 엄청난 규모이다. 코끼리까지 등장한다는 얘기는 했던가? 아무튼 이 오페라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공연되는 위대한 오페라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이다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베르디는 원래 다짐한대로 송아지들과 포도밭이 기다리는 고향 마을도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들이 베르디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당시 가장 유능한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가 간청을 하였다. 보이토는 베르디에게 ‘선생님의 하인이 되어 대본을 쓰는 영광을 갖게 하여 주시면 그 은혜는 백골난망이로소이다’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오텔로(Otello)와 활슈타프(Falstaff)가 탄생하게 되었다. 베르디의 두 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라테의 간곡한 부탁이 이 두 오페라의 탄생에 한 몫 했음은 말한 나위도 없다. 밀라노에서 Otello(오텔로)의 초연이 있었던 날 밤, 베르디는 환호하는 군중들 때문에 극장을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무대에 올라가 환호에 답례하였는지 셀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박수갈채를 끝내고 극장 밖으로 나온 베르디는 수많은 군중들이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베르디를 앞세우고 베르디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야간 시가행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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