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7일은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던 베르디의 서거 1백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이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세계의 수많은 무대에서 베르디의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베르디는 아름다운 멜로디, 감동을 주는 극적인 상황, 그리고 잊지 못할 주인공들로 가득차 있는 걸작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베르디는 자기의 새로운 인생이 나부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바 있다. 1842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나부코가 초연되었을 때 관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채 거의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특히 히브리 포로들이 멀리 두고 온 고향땅을 그리워하면서 Va, pensiero를 부를 때 관중들은 감격의 도가니에서 모두 눈시울을 적시었다. 1840년대의 이탈리아는 외세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나온 베르디의 나부코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마음속으로부터의 애국심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물론 나부코의 엄청난 성공은 비단 이런 정치적인 배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선한 멜로디, 생동감 있는 리듬, 그리고 비길수 없는 삶의 에너지로서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는 오페라였기 때문이었다.
'시실리의 만종'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높았던 베르디는 적곡활동의 초기에 여려 편의 애국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원숙한 작곡활동의 단계에 들어서서는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하여 보다 깊은 명제를 던져주는 작품을 발표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르디가 통일과 자유라는 온 국민의 염원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에 조금이라도 헌신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실로 이탈리아의 통일운동(Risorgimento)의 상징이었다.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1847년 맥베스로서 새로운 도약을 했다. 오래 동안 셰익스피어를 숭모하였던 베르디는 맥베스에 대하여 ‘인간의 최대 창조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상당히 집착했다. 베르디는 맥베스에서 음악도 음악이지만 극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베르디는 맥베스의 초연에 대비한 리허설을 할 때에 맥베스역을 맡은 바리톤에게 ‘극적인 상황과 대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해야 한다.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뒷받침해 주는 오케스트라는 스스로 알아서 극적인 환경에 맞추어 나갈 것이니 걱정할것 없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베르디가 맥베스에서 사용한 음악은 마치 주인공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망령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목관악기를 무대 아래에 두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맥베스 부인(레이디 맥베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채 몽유병자처럼 무의식적으로 걸어 다니는 장면과 그후 미쳐서 광란의 장면을 연출할 때에는 맥베스 부인이 울부짖는 대사를 성악적 스타일이 아닌 인간이 낼수 있는 괴성을 내도록 했으며 음악은 이런 분위기에 적합하도록 기괴한 음향을 만들어 냈다.
'돈 카를로'(플라치도 도밍고)
베르디의 스타일은 리골레토에서 또 다시 커다란 개혁적인 도약을 보여주었다. 베르디는 리골레토에서 처음으로 음악과 연극의 융합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와함께 개인의 성격 표현을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 올렸다. 리골레토가 빌표된 이후 두 편의 다른 오페라가 잇따라 발표되었다.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였다. 일 트로바토레는 감정의 표현이 열정적으로 폭발하는 진정한 멜로드라마였다. 한편, 라 트라비아타는그 반대였다. 라 트라비아타를 쓰기 전에 베르디는 관습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주제를 찾으려고 했다. 라 트라비아타는 보편적인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극단적인 주제의 오페라였다. 도덕적인 사회에서 정당하게 인정받을수 없는 매춘부의 삶을 숭고하게 미화한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가 발표되자 기성사회는 이를 전통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베르디는 이 오페라를 통하여 따듯한 인간애를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베르디의 작품은 점차 깊은 예술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술성이라는 것은 숭고한 인간애에 기본을 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베르디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도중에 시간을 내어 고향마을에 찾아가 마음의 휴식을 찾곤 했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밭을 일구어 농작물을 가꾸는 일을 즐겨했다. 조용한 시골에서는 환호하며 열광하는 사람들을 만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조용하고 순박한 자연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했고 자기만의 묵상을 통하여 신이 인간에게 주는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자 했다. 베르디는 시골생활에서의 휴식을 통하여 심오한 사상을 굳건히 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그랜드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돈 카를로(1867)였고 아이다(1871)였다. 그리고 장엄한 진혼곡(Requiem)을 완성했다(1874). 베르디는 아이다의 초연이 있은지 얼마후 이제는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같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수 없었고 더구나 대본의 천재인 아리고 보이토가 내 놓은 셰익스피어의 오텔로와 활슈타프의 대본에 매료할 수밖에 없어서 다시 펜을 들었다.
'아틸라'
오텔로(Otello)는 세상의 모든 작곡가들이 성취하고 싶어 했던 것이 함축되어 있는 정점에 있다. 오텔로에서는 성격묘사가 분명하다.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멜로디가 있다. 오케스트라는 완벽하게 상황을 표현해 주고 있다. 모든 악장(樂章)은 냉혹하고 비정하게 엮어져 있다.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활슈타프(Falstaff)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 기본을 둔 것이다. 활슈타프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작품이다. 스토리의 진행에 스피드가 있으며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코미디가 넘쳐나는 내용이다. 음악도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와 같이 서정적으로 흐른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는 앙상블을 연주하는 것처럼 예민하게 사용되었다. 이 불후의 걸작은 베르디가 79세 되던 해인 1893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는 그 이후로 8년동안 은퇴 음악인들을 위한 삶의 집을 건설하는 등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생활에 몰두했다. 1901년, 밀라노에 있던 베르디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미리 작성해 놓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극히 검소하게 치루어 줄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한달후, 베르디를 영원한 안식처로 옮길 때 이탈리아 정부대표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조문객이 구름같이 찾아왔으며 푸치니,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죠르다노와 같은 후배 작곡가들도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했다. 밀라노에서 묘지까지 가는 연도에는 3만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하여 위대한 작곡가이며 애국자인 베르디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속에 지켜보았다. 이탈리아의 시인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는 베르디의 삶과 작품을 다음과 같은 짧은 말로 표현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울었고 또 사랑했다.”(He wept and loved for every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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