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프랑스

릴뤼, 장 밥티스트

정준극 2008. 3. 13. 10:03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

장 밥티스트 릴뤼


 

플로렌스 출신의 장 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는 한마디로 태양왕 루이14의 주위를 한결 같이 도는 음악행성이었다. 륄리는 무대를 위한 음악뿐만 아니라 종교음악에 있어서도 대단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음악을 도입한 마에스트로였다. 특히 그의 댄스음악은 유럽 여러 나라가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탈리아 태생의 륄리는 생애를 통하여 거의 80편에 이르는 발레곡과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그는 17세기와 18세기의 프랑스 오페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젊은 작곡가들은 모두 ‘륄리 닮기’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14세 때 프랑스로 건너온 륄리는 춤을 아주 잘 추었으며 바이올린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륄리는 출세를 위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춤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태양왕 루이14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륄리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음악 활동을 모두 장악하는 실력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여 프랑스의 음악 활동을 장악한 것이다.


● 특허 받는 프랑스 오페라 

륄리가 42세 되던 해에 그는 오페라라는 공연예술의 형태를 특허 등록하였다. ‘별 웃기는 특허등록도 다 있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이후부터 프랑스에서 공연되는 어떤 오페라든지 륄리의 승인이 없으면 공연할 수 없다는 왕명이 내려졌던 것이다. 륄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실력자가 되었다. 루이14세에게 접근하려면 우선 륄리를 통하는 것이 첩경이었기 때문에 륄리의 집은 청탁인사들로 문전성시였다. 륄리는 자기 오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유명 극작가와 손을 잡았다. 당대의 몰리에르가 대표적 포섭대상자였다. 몰리에르와 륄리가 합작하여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 즉 코미디-발레라는 것이 출현했다. 오늘날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선조라고 부를 수 있는 연극, 발레, 음악이 복합된 오페라였다.


● 륄리, 그 이후의 이야기

륄리가 프랑스왕궁에 오페라를 선사한 이래 약 1백 년 동안, 프랑스에는 이른바 ‘륄리표 오페라’가 무대를 휩쓸었다. 연극과 발레와 음악이 혼합된 프랑스식 오페라를 말한다. 옛날 그리스에서의 ‘원조(元祖) 오페라’와 이탈리아에서의 ‘전통 오페라’에도 공연 중간에 발레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막간(幕間) 흥행용이었다. 발레가 오페라의 주인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륄리가 주도한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발레가 음악이나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똑 같은 주역이었다. 따라서 오페라 공연시간에서 발레가 차지하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다시 말하여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아리아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프랑스의 오페라에서는 아리아보다는 발레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같은 관습은 2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유지되고 있다. 관중들은 발레가 나오지 않는 오페라는 오페라가 아니라고 까지 말하며 외면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오페라에도 원본에 없는 발레를 집어넣도록 요구했다.


륄리는 오페라를 뮤지컬 코미디 겸 오페라 발레 형태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또 하나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창안하기도 했다. 지휘봉(바통)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지휘는 무조건 맨손으로 했다. 륄리가 처음으로 지휘봉을 사용했다. 당시의 바통은 무척 길었다. 단장만한 길이였다. 바통은 연습 도중 바닥을 탕탕 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지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궁정 무도회에서 춤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시종장 같은 사람이 큰 지팡이를 들고 탕탕 내려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불행’이란 단어는 잘 나가던 륄리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가 55세 때의 어느 날이었다. 태양왕 루이14세가 병에서 쾌차해진 것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에스트로 륄리가 지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섰다. 순간 헛발을 디뎌 쿵하고 미끄러졌다. 뾰족한 구두가 어떤 오케스트라 단원과 정통으로 부딪쳤다. 그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륄리의 음악인생도 종지부를 찍었다. 륄리는 몇 달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륄리는 38세에 첫 오페라를 선보였다. 륄리의 오페라는 16편이 남아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마지막 오페라를 완성하였으며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그의 오페라는 대체로 그리스 신화와 영웅담에 대한 것이다.

 

'페르제'


륄리의 오페라 수첩

Le Burgeois gentilhomme(귀족 신사: 1670. 샹보르 성) Les Fétes de l'Amour et de Bacchus(큐피드와 바커스의 축제: 1672. 파리 Grand Opera: pastorale-pastiche) Cadmus et Hermione(1673. 파리 Grand Opera) Alceste 또는 Le Triomphe d'Alcide(알체스트: 1674. 파리 Grand Opera) Thésée(테제: 1675. 생 제르망) Atys(1676. 생 제르망) Isis (이시스: 1677. 생 제르망) Psyché(프시케: 1678. 파리 Grand Opera) Bellérophon(1679. 파리 Grand Opera) Proserpine(1680. 생 제르망) Persée(페르제: 1682. 파리 Grand Opera) Phaéton(파에통: 1683 베르사이유 궁전 극장) Amadis(아마디스: 1684 파리 Grand Opera) Roland(롤랑: 1685. 베르사이유 궁전극장) Armide(아르미드: 1686 파리 Grand Opera) Acis et Gelatée(아치스와 갈라테: 1686.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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