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와 바이마르의 카롤린 공주
베를리오즈는 바이마르공국의 카롤린 자인-비트겐슈타인(Carolyne Sayn-Wittgenstein)공주에게도 각별한 사모의 정을 가졌었다. 리스트의 후원자(파트론)였던 카롤린 공주는 베를리오즈를 만나 필생의 거작을 한번 작곡해 보라고 권유하며 고대 그리스의 비르길리우스(버질)의 이네이드(Aeneid)를 제시하였다. 카롤린 공주의 각별한 당부를 받은 베를리오즈는 공주에 대한 존경심으로 1856-58의 2년만에 대작 ‘트로이의 사람들’을 내놓았다. 베를리오즈가 55세때였다. 해리에트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직후의였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에 대한 지난날의 무한한 사랑과 카롤린 공주에 대한 존경심을 집약하여 ‘트로이의 사람들’을 완성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트로이의 사람들’은 너무나 대작이어서 1963년 파리 리리크극장에서의 초연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부족하여 제2 파트인 Le prise de Troie만이 무대에 올려졌다. 오페라 전편은 베를리오즈 서거 20년 후인 1890년에야 실현되었다. ‘트로이의 사람들’은 마이에르베르의 작품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이외에도 글룩의 ‘오르페오’, 피에르 나르씨스 게랭(Pierre Narcisse Guérin)의 명화 ‘이니아스와 디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페라를 작곡한 예는 그리 흔치 않다.
카롤린 공주와 리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코지마
‘트로이의 사람들’은 베를리오즈의 백조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Much Ado About Nothing(공연한 야단법석)에서 스토리를 따온 2막의 코미디적 활기에 넘친 Béatrice et Bénédict(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이었다. 이 오페라는 1862년 베를리오즈가 매년 여름이면 방문하여 오페라를 지휘했던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베를리오즈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첫 부인이었던 해리에트와의 인연도 셰익스피어의 연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카롤린 공주와 프란츠 리스트와의 애정은 각별했다. 리스트가 카롤린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35세의 청년시절이었다. 당시 리스트는 유럽에서도 알아 모시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젊음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를 쉬지않고 순회 연주하였다. 리스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때문에 주변에는 항상 여인들이 줄을 서서 있을 정도가 되었다. 리스트를 처음 만났던 당시 카롤린 이바노스스카(Carolyne Iwanowska)는 28세였다. 카롤린은 폴란드-러시아 계통의 부유한 지주였다. 카롤린은 불행하게도 독일 오리진의 러시아 궁정 승마 교관인 자인-비트겐슈타인의 니콜라우스(Nikolaus)와 결혼하였다. 니콜라우스가 왕족의 혈통이므로 카롤린도 대공비(Fuerstin) 또는 공주라고 불렸다. 두 사람은 서로 문화생활이 달라 친목하지를 못했다. 카롤린 공주가 리스트를 만난 것은 1847년 2월 키에프(Kiev)에서 열린 어떤 자선음악회에서였다. 카롤린은 리스트의 연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0 루벨(Rubel)을 전달하였다. 리스트는 답례하기 위해 카롤린 공주가 묵고 있던 호텔을 방문하였다. 이로써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카롤린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재산을 팔아 백만 루벨을 마련하여 딸과 함께 리스트를 찾아갔다. 카롤린은 리스트를 위해 연주회를 주선하였고 리스트는 카롤린을 위해 작곡을 하였다. 얼마후 리스트는 봐이마르 궁정음악장(Hofkapellmeister)에 임명되었다.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와 함께 봐이마르에 왔다. 카롤린은 궁전과 같은 웅장한 저택을 사서 리스트와 함께 동거하였다. 두 사람은 봐이마르에서 자주 음악회를 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드리치 스메타나, 요한네스 브람스 등이 리스트의 연주회에 자주 참석하였다.
그러나 리스트와 카롤린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특히 봐이마르 궁정 사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카롤린은 남편 니콜라우스가 이혼을 해주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 카롤린과 니콜라우스는 둘다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결국 카롤린은 1860년 봐이마르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교황으로부터 이혼 승낙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듬해인 1861년 10월 리스트라 50세 생일을 맞이한 날에 두 사람은 로마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남편 가족으로부터 이혼 불가의 통보가 날라 왔다. 두 사람의 결혼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망한 리스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카롤린은 로마에 남아 25년을 더 살며 신학공부에 전념하였다. 카롤린은 1887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카롤린의 장례식에서는 리스트의 친구인 아베(Abbe)가 작곡한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어느때 리스트는 카롤린과의 사랑에 대하여 '이 세상 모든 것보다 귀중한 사랑'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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