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프랑스

[참고자료] 아일랜드의 뮤즈 해리에트와 베를리오즈

정준극 2008. 3. 13. 10:11
[참고자료] 

아일랜드의 뮤즈(Muse) 해리에트와 베를리오즈

 

아일랜드의 뮤즈(시와 음악 등을 주관하는 그리스의 여신)라고 불리는 여배우 해리에트 스미드슨(Harriet Smithson)은 베를리오즈의 첫 부인이었다. 해리에트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펠리아(Ophelia)로 세상을 사로 잡았던 뛰어난 연극배우였다. 파리에서 해리에트의 '햄릿'을 보고 첫눈에 해리에트를 사랑하게 된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유명한 '환상적 교향곡'(Symphony Fantastique)을 작곡하기까지 했다. 해리에트는 1800년 아일랜드 클레어(Clare)지방의 에니스(Ennis)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리머릭(Limerick)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곳이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극장을 경영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연극무대에서 대체로 단역을 맡아하던 배우였다. 해리에트는 아버지가 병에 걸려 활동을 하지 못하자 10대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배우가 되어 더블린의 무대에 데뷔하였고 이어 빛나는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해리에트는 18세 되던 해에 바다 건너 영국으로 가서 연극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비록 경험은 부족했지만 뛰어난 미모와 감동적인 연기력,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듬해에는 유명한 런던의 드러리 레인(Drury Lane)극장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사실 영국에서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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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의 뮤즈 헤리에트(앙리에트)


해리에트가 정작 성공을 거둔 곳은 파리였다. 파리의 오데온(Odeon)극장에서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맡았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감격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이어 '햄릿'의 오펠리아로서 무대에 나타나자 거의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실제로 관중들은 무대에 등장한 해리에트의 모습만 보는것 만으로 감동했다. 특히 오펠리아가 정신이상을 일으킨 연기를 할 때에는 모두들 심장의 박동까지 멈출 정도로 무아지경이었다. 해리에트를 보기 위해 수많은 명사들이 오데온극장을 찾았다. 그 중에는 소설가 빅토르 위고, 화가 들라크로와, 시인 드샹(Deschamps), 작가 고티에(Gautier)와 뒤마(Dumas), 그리고 젊은 작곡가인 베를리오즈가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의 연극 공연을 처음으로 보자마자 당장에 마치 벼락을 맞은듯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부터 해리에트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꽃을 보내고 선물을 보냈으며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해리에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몇 년동안 만난 일이 없었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베를리오즈의 마음은 언제나 해리에트에게 향해 있었다. 이러한 상심의 기간에 베를리오즈는 '환상적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해리에트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 베를리오즈는 ‘환상적 교향곡’의 초연에 해리에트에게 초대권을 보냈다. 연주회를 관람한 해리에트는 그 교향곡이 자기를 위해 작곡한 것을 비로소 알고 크게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랑의 완성인 결혼에 골인하였다. 당대의 여배우와 천재적 작곡가의 결혼식은 1833년,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조용하게 거행되었다. 프란츠 리스츠가 결혼식의 증인이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파리의 몽마르트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아들 루이(Louis)가 태어났다.

 

 오펠리아 역의 해리에트


그러나 몇 년후 두 사람 사이는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해리에트는 배우로서 무대 생활에서 실패를 거듭하였고 그로 인해 심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 베를리오즈가 계속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서 사교계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주위에 여인들이 몰려들게 되자 심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결혼 10년후 이들은 정식으로 헤어졌다. 이후 해리에트는 중풍에 걸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생활을 했다. 1854년 3월 3일,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여배우 해리에트는 54세를 일기로 파리의 몽마르트에 있는 작은 아파트 방에서 가난과 비참을 등지고 세상을 떠났다. 몽마르트 공원묘지에 있는 해리에트 묘비에는 [Henriette Constance Berlioz Smithson, nee a Ennis en Irlande, mort a Montmarte le 2 mars 1954]라고만 적혀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를 프랑스식으로 앙리에트(Henriette)라고 불렀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에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 해에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Marie Recio: 1814-1862)와 재혼하였다. 마리 레치오는 결혼식을 올리기 10여년전부터 베를리오즈의 연인(정부)이었다. 베를리오즈는 두 번째 부인 레치오가 세상을 떠난후 7년을 더 살았다. 베를리오즈는 몽마르트의 해리에트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나중에 베를리오즈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 레치오도 몽마르트에 같은 장소에 묻히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와 해리에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인 루이는 젊을 때 해군 수송선의 장교로 들어가 나중에는 함장까지 되었으나 1867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바나에서 근무할 때 황열별(Yellow Fever)에 걸려 숨졌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베를리오즈는 절망으로 나날을 보냈으며 작곡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베를리오즈의 마지막 작품은 해리에트가 인기를 차지했던 줄리엣을 생각하여 작곡한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해리에트가 온 몸이 마비된 병마와 싸우고 있던 시기에 작곡하였다.


해리엣 스미드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