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

정준극 2008. 3. 14. 15:10
 

● 대본가 로렌쪼 다 폰테, 또 하나의 돈 조반니

모차르트가 오페라로서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모차르트 혼자만의 공이 아니다. 모차르트는 음악만을 썼을 뿐이다. 대본은 희대의 특급 강남 제비족 겸 또 다른 ‘돈 조반니: 돈 후안’인 로렌쪼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거의 다 썼다. ‘희대’라고 표현한 것은 그 역시 모차르트와 콤비가 맞는다고 할 만큼 약간 저질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폰테의 곁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넘쳐 있었다. 대본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럴듯한 대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의 눈은 저 고요하고 푸른 바다, 당신의 입술은 향기를 머금은 저 한 송이 붉은 장미, 신은 어찌하여 당신에게만 이토록 아름다움을 선사하였는가?’라고 읊어댄다면 세상에 혹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 것인가?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만남은 두 호색한에게 더 할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돈 조반니에서 ‘카타로그의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자기의 유혹에 빠져 넘어간 여자가 2천명도 넘는다는 돈 조반니의 독백! 바로 다 폰테의 독백임이 분명하다. 다 폰테가 썼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악동들은 합작하여 세 편의 걸작 오페라를 완성하였으니 Le Nozze di Figaro, Don Giovanni, Cosi Fan Tutte이다. ‘모차르트-다 폰테 합작 프로덕션’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푸니아(Opera funnia)를 단연 능가하는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최고 결정판이었다.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는 1790년 비엔나에서 초연되었으나 황제의 서거로 단 몇 차례 공연만을 가졌을 뿐이다. La Clemenza di Tito(티토의 자비)는 1971년 프라하에서 있었던 합스부르크 황제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공연되었다. 모차르트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Die Zauberflöte(마적)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작곡한 오페라이다. 첫 히트작인 ‘후궁에서의 도피’와 마찬가지로 독일어로 되어 있으며 스타일도 독일 특유의 징슈필(노래 연극)에 속한다. ‘마적’에서 모차르트는 처음으로 ‘고난을 통한 완성’이라는 글룩(Gluck)의 정신을 재현한다. 마치 자기야 말로 글룩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모차르트는 ‘마적’이 초연된지 얼마 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후 상당 기간, 모차르트가 라이벌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독살 당하였다는 소문이 퍼진 일이 있다. 얼마전 나온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그런 암시가 있었으니 아무튼 무슨 연관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만 후세의 연구에 의하면 ‘과로’가 공식 사인이었다고 하며 더욱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신장질환 및 성홍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러시아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모차르트 및 살리에리와 아무런 연관성도 없으면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질투심 때문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뉘앙스가 풀기는 오페라이다.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


모차르트에게 있어서 오페라는 처음에는 야망이었다. 유명해지기 위한 첩경으로서의 오페라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연대는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작품에는 오페라라고 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무대 작품(Stage Works)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모차르트는 10세 때에 첫 오페라를 썼다. 이때로부터 20세 초반까지의 10년동안 작곡한 것을 초기작품이라고 부른다. 24세 때부터 3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10년 동안 작곡한 것을 후기작품이라고 부른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모두 22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