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음악의 성인
루드비히 반 베토벤
우리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악성(樂聖)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음악의 성인! 이보다 더한 존경의 표현은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존칭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 하지만 위대하다는 단어 하나 가지고는 그를 평가하는데 부족하다.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베토벤이다. 왜 베토벤을 위대하다고 하는가?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각자가 연구해야 할 테마!
베토벤은 다른 여러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 숭배자였다.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모차르트의 천재성, 과감한 독창성, 그리고 아마 풍자성과 반항적 기질에 대하여 존경을 보냈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무척 숭배하였지만 모차르트처럼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지는 않았다. 단 한편! Fidelio(휘델리오)가 있을 뿐이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휘델리오는 지금까지의 일반 오페라에 비하여 이질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장엄하고 숭고한 면이 있다. 지금까지 휘델리오에 대하여는 어떠한 비판도 없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찬사만 받았기 때문이다.
'휘델리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독일의 본(Bonn)에서 요한(Johann)이라고 하는 궁정음악가의 이들로 태어났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아버지도 어린 베토벤을 돈 벌이 되는 신동으로 만들려고 꽤나 노력했고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체벌까지 가했다. 아마 이런 달갑지 않는 과거의 공통 경력 때문에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다른 모든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베토벤도 비엔나로 왔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으며 군주인 마리아 테레제 여제와 그의 뒤를 이은 요셉2세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것도 음악가들을 비엔나로 모으는 이유였다. 하지만 베토벤의 경우에는 아마 아버지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점에서도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이력서가 비슷하다.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작곡에만 전념했다. 가끔 자기 작품을 연주하기도 했지만 모차르트처럼 놀고 마시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피아노는 후원자인 귀족들의 청에 의해서 간혹 연주했지만 마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간청해도 단연 거절이었다. 어떤 날, 베토벤은 괴테와 함께 비엔나 중심가의 링 슈트라쎄(Ring Strasse)의 부루크가르텐(궁정정원)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괴테는 만나는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모자를 벗으면서 공손히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모른척 하고 지나치기만 했다. 베토벤보다 20여세나 많았던 괴테는 베토벤에게 ‘여보게! 아, 저런 사람들한테 인사를 잘해야지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나무라듯 말해 주었다. 그러자 베토벤은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이 나한테 인사해야지 왜 제가 저들에게 인사를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베토벤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 절대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보다도 귀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베토벤보다 한 살 많은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베토벤을 만나고자 부하를 보냈을 때 처음엔 나폴레옹을 존경했다가 나중에는 속물로 규정한 베토벤은 ‘나를 만나고 싶다면 직접 오라고 하시오! 그래서 온다면 나는 이곳에 없을 것이요!’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자신의 성격도 그랬지만 그의 작품도 성격만큼이나 열화와 같았고 충동적이며 감성에 치우쳤고 어느 경우에는 노도광풍과 같았다. 하지만 연주회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없는 듯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무대를 떠나면 그 유별난 성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거의 날마다 집주인 아줌마와 말다툼을 벌였다.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특이하고 불같은 성격 때문에 얼마 안 가서 헤이지기가 일수였다. 베토벤은 하숙집에 있어서나 여자관계에 있어서나 롱 텀(long term)타입이 아니었다.
'휘델리오'에서 레오노레 역의 에바 마튼
● 역경을 극복한 인간 승리
31세 때부터 베토벤은 청각을 완전히 잃었다.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일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베토벤의 열정은 작곡으로만 빠져 들어갔다. 한때는 청각장애를 치료할수 있다는 희망으로 온천장에서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등 열심히 요양했다. 제자인 체르니가 특별히 만든 보청기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나서 실망과 좌절과 분노 때문에 자기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음을 들을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음악은 인간주의 그 자체였다. 자기에게 닥쳐온 운명을 무정하기만 한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그저 열심히 작곡만 했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에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 작곡했는지 상상해 보시라!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베토벤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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