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징슈필 추구
펠릭스 바르톨디 멘델스존
무대 음악인 ‘한여름 밤의 꿈’으로 유명한(이 작품에서 나오는 결혼행진곡은 오늘날 신식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에 연주되는 곡이다) 펠릭스 바르톨디 멘델스존(Felix Bartholdy Mendelssohn: 1809-1847)이 오페라를 남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6편의 오페라를 남겼고 1편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이들 오페라 (어떤 것은 징슈필 형태)들은 오늘날 잊혀 있어서 거의 공연되고 있지 않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의 오페라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60년 후인 2004년에 초연된 Die Heimkehr aus der Fremde(외국에서의 귀향)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켜 레코딩이 되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유태계 독일인이다. 그래서 나치는 그의 음악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연주를 금지했으며 여러 곳에 있는 멘델스존 기념상들을 철거했다. 독일 국수주의자 및 우월주의자라고 할수 있는 바그너도 평소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지휘하기를 기피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너무나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잘 아는대로 오라토리오 ‘엘리아’를 비롯하여 종교 음악을 많이 남겼고 이밖에 피아노곡, 바이올린곡, 가곡, 합창곡, 교향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걸작들을 남겼다.
멘델스존의 부인 세실 장르노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어머니는 레아 살로몬(Lea Salomon)이었으며 할아버지는 유명한 유태교 랍비로서 철학자인 모세 아브라함이었다.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펠릭스는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더구나 가족과 함께 유럽 여러 곳을 여행 다닌 것은 그에게 많은 교양과 경험을 준 것이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당시에도 유태인들은 사회적으로 서러움을 많이 받았다. 대개의 경우 게토에서 속박되어 지내야 했다. 그래서 어떤 유태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는 이런 일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네명의 자녀(화니, 레베카, 펠릭스, 파울)들의 장래를 위해 어릴 때 루터교에서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할아버지인 랍비는 ‘안돼! 안돼!’를 외쳤지만 손자들의 개종을 막지 못했다. 1812년 나폴레옹이 함부르크를 점령하자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사 갔다. 이와 함께 할아버지 모세도 결국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모두들 멘델스존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르톨디라는 독일식의 점잖은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소년 펠릭스는 원래의 유태인식 이름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였다. 베를린에 온 멘델스존은 훌륭한 선생을 모시고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할수 있었다. 멘델스존의 집에는 예술가 등 지식인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이들이 어린 멘델스존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멘델스존
멘델스존은 모차르트 이후의 가장 천재적인 음악가고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평판에 걸맞게 멘델스존은 소년 시절부터 여러 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솜씨가 뛰어났으며 그림도 잘 그렸고 외국어에도 탁월했다. 피아노는 여섯 살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멘델스존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38세) 비교적 많은 작품을 남겼다. 첫 작품인 피아노 4중주곡은 13세 때에 작곡한 것이다. 그의 누이인 홰니 헨젤(Fanny Hensel) 역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홰니는 당시 이름을 날렸던 피아니스트였으며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멘델스존은 명석하였고 지성이 풍부하였으며 성격도 명랑하였다. 연로한 괴테가 멘델스존을 만나서 ‘내가 마음이 울적할 때는 제발 좀 찾아와서 기분을 명랑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멘델스존과 대화를 나누면 그 풍부한 지식과 위트로 누구나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멘델스존의 작곡재능을 보고 집에 소규모 개인 오케스트라를 두고 아들이 작품을 쓰면 어떤 것인지 듣기위해 연주토록 했다. 멘델스존은 이미 10대의 소년시절에 12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대개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대한 ‘멘델스존 가정음악회’에서 연주되었다.
'한 여름 밤의 꿈'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칼 프리드리히 첼터(Carl Friedrich Zelter)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다. 첼터는 베를린 합창아카데미 지휘자였다. 첼터가 세상을 떠나자 멘델스존은 이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멘델스존은 이 합창단과 함께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지휘자로 결정되었다. 아마 멘델스존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지만 젊은 멘델스존이 합창단 지휘자가 되면 개혁을 할 것 같아 걱정이 되어서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멘델스존이 유태계였기 때문에 미역국을 먹지 않았을까 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은 26세 때인 1835년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Gewandhaus)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멘델스존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임명이었다. 왜냐면 그는 이제부터 자기가 완전히 독일인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멘델스존은 조국 독일의 음악발전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슈만 등 거물들을 이 음악원의 교수진으로 영입하였다.
그는 18세 때에 첫 오페라인 Die Hochzeit des Camacho(카마초의 결혼)를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그다지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멘델스존은 28세 때에 세실 장르노(Cecile Jeanreneau)와 결혼하여 비록 10년에 불과한 결혼생활이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두었다. 칼, 마리, 파울, 펠릭스, 릴리였다. 멘델스존은 아직도 30대 후반의 젊음이었지만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특히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 누이인 홰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상심이 매우 컸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1847년 라이프치히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베를린-크로이츠버그의 3위1체 묘역에 안장되었다.
멘델스존의 오페라 수첩
● Die Soldatenliebschaft(1820. 사랑의 전령병) ● Die beiden Pädagogen(1821. 두명의 행인)● Die wandernden Komödianten(1822. 유랑 코미디 극단) ● Die onkel aus Boston(1823. 보스턴에서 온 삼촌. Die beiden Neffen) ● Die Hochzeit des Camacho(1827. 카마초의 결혼) ● Die Heimkehr aus der Fremde(1829. 귀향) ● Loreley(1847. 로렐라이.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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