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 탐미적인 음조시

정준극 2008. 3. 14. 15:58
 

● 탐미적인 음조시

리하르트는 15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어느 작품에서나 그의 ‘음조시’를 느낄수 있다. 리하르트 역시 바그너(바그너의 이름도 실은 리하르트)식 라이트모티프(주도 주제: 각 주인공별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음악)를 자기의 오페라에 도입하였다. 사실 리하르트는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여럿 있었다. 리하르트가 나치에 동조하였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뮌헨의 대규모 나치 집회에서 여러 차례 연주하였다. 그 덕택에 리하르트는 베를린에 초대 받아 가기도 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가 특별히 좋아한 것이다. 나치 군중집회에는 바그너의 음악이 거의 항상 뒤따랐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행진’은 히틀러의 나치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곡이었다.


리하르트의 베스트 앨범은 살로메(Salome)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연극을 기초로 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이 연극이 공연금지 되었었다. 리하르트가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오페라 살로메를 작곡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페라 살로메는 대단히 신경질적이며 음탕하기 까지 한 젊은 공주에 대한 얘기이다. 살로메 앞에 끌려 온 세례 요한은 감옥 생활 때문에 몸에서 너무나 더럽고 악취가 나서 사람들이 옆에 서 있지 못할 정도였지만 살로메는 이런 세례 요한에게 키스해 달라고 간청한다. 결국 세례 요한은 구역질을 참지 못하는 살로메의 애인 근위대장의 칼에 목을 잘린다. 이때에 부르는 살로메의 아리아가 I'm enamored of your hair(그대의 머리칼에 매혹되어)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들려주는 불멸의 노래이다. 아무튼 리하르트의 음악은 설명을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어렵다. 아마 작곡자 자신을 제외하고서는 모두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바로 리하르트의 오페라가 주는 묘미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독일 백성들은 리하르트의 오페라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 워낙 철학적인 백성들이라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백성들은 달랐다. 특히 오페라 ‘살로메’에 대하여 완전 구토 증세를 보여주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은 1905년에 무대에 올린 살로메 공연이 너무 역겨워 이후 17년 동안이나 이 오페라의 공연을 금지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좋아하고 있는 살로메의 모습. 이 모습을 본 청교도 후예들은 오페라 ‘살로메’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이다.

 

 '살로메' (살로메와 세례 요한)


리하르트가 메트로폴리탄의 반응을 진솔하게 받아 들였다면 문제는 간단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메트로폴리탄의 구토 증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렉트라(Elektra)를 내놓았다. 1909년 드레스덴 국립오페라에서 첫 공연되었다. 남매가 합작하여 못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를 끔찍하게 살해한다는 스토리이다. 아마 그 남매는 근친상간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난 오뉘는 서로 껴안고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신화이니까 무슨 얘기나 가능했을 것이다. 이 오페라가 나온 당시는 저 유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가 한창 자기 이론을 주장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한 판에 나온 Elektra(엘렉트라)는 사이코드라마의 대표주자로서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혼돈시켜 주는 것이었다. 내용은 그렇다고 해도 음악 또한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중들은 주인공 엘렉트라가 내 지르는 비명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11년, Der Rosenkavalier(장미의 기사)가 발표되었다. 리하르트 최대의 걸작이라고 평가 받는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에는 근친상간, 살인, 구역질나고 혐오감을 주는 추악한 장면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감미로움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특유의 관능적인 선율이 전편을 수놓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편에 걸쳐 왈츠의 선율이 미끄러지듯 흐르는 오페라이지만 실제로 이 오페라의 무대인 1740년대의 비엔나에는 왈츠 같은 것이 생기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장미의 기사'(모니카 그룹)


‘리하르트 갈라 쇼’에는 바그너의 영향이 많이 스며있다. 조명도 그렇고 오케스트라 편성도 그렇다. 다 아는대로 리하르트가 바그너의 숭배자였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리하르트 오페라의 어떤 부분은 멜로디 전개가 놀랄 만치 복잡하다. 장식음이 많이 딸려있다. 이것도 바그너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오케스트라 편성 역시 아주 복잡하다. 연주하기에 매우 힘들다. 그래서 새로운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서는 리하르트의 관현악곡 연주가 시험문제로 나와 골탕을 먹일 정도이다. 리하르트는 지휘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때문에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오랜 동안 음악 활동을 할수 있었다. 지휘자이기 때문에 박수도 많이 받았다. 주로 자기 작품을 지휘했지만 바그너의 것도 잊지 않았다. 음악적으로는 천재라고 할 정도로 우수하였지만 지휘 폼은 형편없었다.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거의 무표정하게 지휘했다. 정확하기는 했지만 열정은 없는 듯이 보였다. 그저 지휘봉을 허공에 내 저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한 손으로만 지휘했다. 다른 한 손은 조끼 주머니에 찔러 넣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는 작곡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85세까지 장수하였다(베르디는 88세에 세상을 떠났고 바그너는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첫 오페라는 그가 30세 때에 작곡하였다. 마지막 작품은 그가 78세 때 내놓은 것이다. 그만큼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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