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미주와 아시아

[참고자료] 보데빌과 토니 파스터

정준극 2008. 3. 19. 14:50

[참고자료] 보데빌과 토니 파스터

 

1880년대의 미국. 산업혁명의 여파는 전통적인 미국 농촌의 얼굴을 변화시켰다. 농촌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로 몰려들어 틀에 박힌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도시생활에서는 농촌생활에서 맛볼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찾아볼수 없다. 농사를 하거나 목축을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 손에 쥐는 몇푼의 지폐, 그리고 주말의 한가로운 휴식같은 것들이다. 도시인들은 무언가 주말마다 즐길수 있는 엔터테인멘트를 찾고자 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버라이어티 쇼라는 것이 도시의 작은 극장이나 술집(Saloon)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이런 쇼들은 거의 모두 내용이 조잡하고 천박하기 까지 했다. 여성들이나 어린이가 함께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버지니아 민스트렐스의 쇼 공연

 

순회극단이 펼치는 민스트렐 쇼(Minstrel Show)라는 것도 있었다. 대체로 흑인 분장을 한 가수들이 벤조를 타며 흑인 노래를 불렀다. 속칭 니그로 민스트렐(Negro Minstrel)이라고 부르던 것이었다. 민스트렐 쇼는 ‘금발의 제니’가 나온 스테판 포스터 시대에 한창 인기를 끌던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부터 그런 답답한 민스트렐 쇼는 인기를 잃어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음악 CD, DVD, MP3, TV가 나오지 않았던 때였다. 영화는 겨우 무성영화가 있었지만 대부분 슬랩스틱(치고 받는 난장판의 코미디)이어서 한두번 보면 체할 지경인 것이었다. 도시인들의 빈 공간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때에 등장한 것이 미국 특유의 보드빌(Vaudeville)이었다.

 

미국 보데빌의 여왕 매 웨스트(Mae West) - 영화 다이아몬드 릴(Diamond Lil)의 한 장면.

 

1849년 Astor Place Riot라는 사건이 뉴욕에서 터졌다. 미국의 상류와 하류 관중들이 편을 갈라 일대 격돌을 벌인 사건이다. 서민층 사람들이 상류층 인사들이 점잖게 앉아서 오페라나 뮤지컬을 관람하는 극장에 들어오자 ‘이게 웬 일이냐?’면서 난리를 폈던 것이고 이에 대하여 서민층은 ‘웃기고 앉았네! 지들이 뭔데!’라면서 대들은 것으로부터 사건이 비화되었다. 이 사건 이후 뉴욕의 엔터테인멘트는 확연하게 분류되었다. 오페라는 상류 또는 중상류인들을 위한 것이 되었고 민스트렐 쇼와 멜로드라마는 중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만해도 명맥을 유지하던 버라이어티 쇼는 남성과 직장인, 빈민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되었다. 극단적이 아니며 누구나 즐길수 있는 건전하면서도 가족적인 쇼가 필요했다. 보드빌은 모든 부류의 관중을 위해 개발되었다. 보드빌은 ‘깨끗한’ 버라이어티 쇼라고 했다. 조잡하고 유치한 내용을 없애고 가족과 같은 친근미가 있는 쇼를 개발했다. 이런 보드빌을 주도한 인물이 토니 파스토(Tony Pastor)였다.

 

토니 파스토 공연 포스터      토니 파스토 순회공연단

 

파스토의 보드빌 쇼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즐길수 있는 것이었다. 뉴욕의 대중음식점, 큰 상점, 기차역 대합실에서도 공연되었고 입장료 50센트만 내면 아무나 부담 없이 즐길수 있었다. 물론 대극장에서도 공연되었고 관중들 중에는 영향력있는 인사들도 많았다.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와 만담, 춤, 곡예가 주요 레퍼토리였다. 파스토 스타일의 보드빌은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급속히 번져갔다. 길버트와 설리반의 뮤지컬이 보드빌 형태로 꾸며지는 것은 대인기였다. 보드빌은 미국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긴 미국식 뮤지컬이며 오페라였다. 전설적인 코미디언 밥 호프는 보드빌 무대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