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바리톤

라트비아의 거인 Georgy Baklanov (게오르기 바클라노브)

정준극 2008. 3. 25. 09:51
 

라트비아의 거인 Georgy Baklanov (게오르기 바클라노브)

 

 

게오르기 바클라노브는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가장 뛰어나고 인상적인 바리톤 겸 배우였다. 그는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음색은 비록 어두운 컬러였지만 대단히 세련되어 있어서 감동을 주었다. 그의 음역은 베이스G로부터 중간C를 넘어 G까지 무난히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레퍼토리는 바리톤과 베이스를 함께 포함하였다. 그는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바클라노브는 대단한 거인이었다. 그의 키는 2미터나 되었으며 체중도 1백 Kg가 넘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리스로서 무대에 등장하면 마치 거인과 같은 장엄한 인상을 주어 무대를 압도하였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의 그는 대단히 부드럽고 신사적이며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이크-업의 천재였다. 천의 모습을 가진 얼굴로 변할수 있었다. 여기에 그의 드라마틱한 연기는 깊이가 있었다. 그는 루바토(Rubato)와 마르카토(Marcato)를 너무 자주 사용한다는 염려의 소리를 들었지만 이러한 테크닉을 활용하여 노래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는 재주는 놀라운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몇장의 음반을 남겼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의 찬란한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네로'에서 빈덱스(Vindex)

 

1880년 발틱 3국중의 하나인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태어난(생 페테르부르크라는 주장도 있음) 게오르기 바클라노브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집안의 권고에 따라 생페테르부르그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노래를 향한 그의 열정은 숨길수가 없었다. 특히 오페라 아티스트로서 성공하고 싶은 꿈은 접을수 없었다. 당시 러시아 오페라극장들의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그러므로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무대에 등장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바클라노브는 과감히 법대를 중퇴하고 성악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3년 그가 23세 때에 키에프오페라에서 루빈슈타인의 ‘악마’(The Demon)로 데뷔하였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의 볼쇼이, 생페테르부르크의 마리인스키(1903-1917), 보스턴오페라(1915-1918), 코벤트 가든(1910), 비엔나궁정오페라(슈타츠오퍼: 1912-1916), 시카고오페라(1917-1928), 필라델피아오페라(1928-1935)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밖에 베를린, 파리, 메트로(단 1회 공연), 베오그라드, 취리히, 그리고 스캔디나비아와 남미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다.

 

'카르멘'의 에스카미요

 

그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폭이 넓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작품을 주로하면서도 독일과 러시아 작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욕심많은 기사’(The Miserly Knight)에서 남작,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에서 란체오토(Lanceotto),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서 바르나바(Barnaba), 카르멘의 에스카미요,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발렌틴, 들리브의 라크메에서 니칼란타, 가면무도회의 레나토, 리골레토,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달베르의 티프란트(Tiefland)에서 세바스티아노,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마스네의 타이스에서 아타나엘, 마스카니의 이사보에서 라이몬도,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에서 오네긴, 토마의 햄릿에서 햄릿, 보리스 고두노프, 루빈슈타인의 네로(Nero)에서 빈덱스(Vindex), 글룩의 ‘얼리드의 이피게니’(Iphigenie en Aulide)에서 아가메논, 마르슈너의 한스 하일링에서 타이틀 롤, 오텔로에서 이아고, 팔리아치의 토니오,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 글링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에서 루슬란, 샤펜티어의 루이제에서 아버지,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에서 골러드(Golaud), 로엔그린의 텔라문트, 발퀴레의 보탄, 몬테메찌의 ‘세개의 오렌지 사랑’에서 만프레도, 죠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제라르, 훼브리에의 몬나 반나(Monna Vanna)에서 귀도(Guido), 마스네의 클레오파트라에서 마르크-안투안, 알파노의 ‘부활’에서 시몬슨, 달베르의 미스터 우(Mister Wu)에서 타이틀 롤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이 중에서 그는 1906년 모스크바의 임페리알 하우스에서의 The Miserly Knight 초연, 1906년 역시 같은 극장에서의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1914년 몬테 칼로 오페라에서의 I Mori Di Valenza의 세계 초연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는 전성기에 유명한 러시아 소프라노인 리디아 리프코브스카(Lydia Lipkowska)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다. 1932년부터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6년후인 1938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거장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