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바리톤

바리톤 배우 Vanni-Marcoux (바니 마르쿠)

정준극 2008. 3. 25. 10:21
 

바리톤 배우 Vanni-Marcoux (바니 마르쿠)

 

 

 메피스토펠레


바니-마르쿠는 일반적으로 ‘노래하는 배우’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만큼 무대에서 그의 존재는 뛰어났다. 그의 음성에는 물에 젖은 듯한 윤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의 음색은 프랑스 특유의 감각을 지닌 것이었다. 특히 그의 대사(가사 발음)는 아름다운 프랑스어의 문학적 향취가 넘쳐흐르는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베이스이면서도 밝은 음성으로 일반적인 베이스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베이스에 비하여 음성이 대단히 젊었다. 예를 들어 돈 카를로에서의 필립왕은 거의 테너와 같은 음색이어서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역할은 돈키호테였다. 그는 연약한것 같으면서도 강인한 성격의 돈키호테를 그야말로 천부적 재능으로 표현하였다.

 

돈키호테

 

바니-마르쿠는 1877년 이탈리아 토리노(튜린)에서 조반니 마르쿠로 태어났다. 조반니의 이탈리아식 애칭은 바니(Vanni)이다. 그래서 전문활동을 할 때에도 어릴 때의 애칭인 바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바니-마르쿠는 프랑스의 오페라 아티스트이다. 실제로 그의 프랑스 이름은 장-에밀 디오제느(Jean-Emile Diogéne)이다. 토리노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법이 밥 먹여주나?’라는 생각으로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성악수업을 받았다. 첫 오페라 데뷔는 1894년, 놀랍게도 17세 때에 토리노에서 리골레토의 스파라푸칠레(자객)였다. 분장에 탁월한 그를 보고 아직 10대의 청년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첫 프랑스 무대 등장은 22세 때인 1899년이었다. 고도 바욘느(Bayonne)에서 로랑신부(Frére Laurent)를 맡은 것이었다. 몇 년후 그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 진출하여 바질리오(세빌리아의 이발사)로서 확고한 명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7년동안 코벤트 가든의 시즌에 매년 출연하였다. 1909년 파리 오페라에서의 앙리 페브리에(Henri Février)의 몬나 반나(Monna Vanna)에서 귀도 콜로나(Guido Colona)를 맡은 것은 그의 명성을 온 프랑스에 알린 계기였다. 3년후 그는 마스네의 ‘돈키호테’(Don Quichotte)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역할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돈키호테에 감격한 마스네는 특별히 바니-마르쿠를 위해 ‘파뉘즈’(Parnuge)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파뉘즈는 1913년 초연되었다.

 

스카르피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바니-마르쿠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베이스로서 프랑스 작품뿐만이 아니라 바그너의 훈딩(Hunding)이나 파프너(Fafner)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는 거의 40년동안 파리인의 음악생활 속에서 가장 친밀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1차 대전중에는 프랑스군으로 참전하여 10개월에 걸친 독일과의 전투에서 70만명의 사상자, 실종자를 낸 베르뒨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은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1922년 그는 라 스칼라에 모습을 보였다. 토스카니니 지휘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특히 그의 연기는 마치 보리스가 무대에 환생한 것과 같은 인상을 준 것이었다. 바니-마르쿠는 샬리아핀 이후 가장 뛰어난 보리스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어 파리는 그를 푸치니의 ‘자니 스키키’ 프랑스 초연에 초청하였다.


한편, 전쟁이 터지기 전, 헨리 러셀(Henry Russel)의 초청으로 보스턴에 가서 일약 스타로서 찬사를 받았음은 빼놓을수 없는 얘기이다. 보스턴에서의 첫 출연은 ‘플레아와 멜리상드’에서 골러드(Golaud)를 맡은 것이었다. ‘파우스트’에서의 메피스테펠레도 그 드라마틱한 연기와 노래로 대단한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또한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코펠리우스, 미라클 박사, 크레스펠, 다페르투토를 맡은 것은 그의 경력에 있어서 가장 역사적인 성공인 역할이었다.

 

페비에르의 몬나 반나(Monna Vanna)에서 귀도 콜롬나(Guido Colomna)

 

미국에서의 이같은 성공은 메리 가든(Mary Garden)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메리 가든은 미국에서 프랑스 오페라로서 정상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바니-마르쿠는 메리 가든의 상대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자주 갖게 되어 아울러 대단한 인기를 차지하였다.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콤비였다. 바니-마르쿠가 메리 가든과 결혼하기 위해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하였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메리 가든은 이러한 소문을 일축하였지만 아무튼 메리 가든은 바니-마르쿠와 함께 ‘타이스’, ‘토스카’, ‘돈키호테’, ‘플레아와 멜리상드’, ‘카르멘’에서 호흡을 함께하며 공연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메리 가든이 무대를 떠나자 메리 가든이 없는 프랑스 오페라는 생존할수 없을 정도여서 자연히 프랑스 오페라의 공연이 감소되었고 결국 바니-마르쿠에게도 배역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계속 무대 활동을 하다가 1948년 무대에서 은퇴하여 몇 년동안 보르도 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일하였다. 그는 1962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의 인생도 돈키호테와 같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