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파이어 대성당 (Speyer Cathedral: Speyerer Dom)
- 일명 제국 성당(Kaiserdom) - 루돌프1세 등 안치
-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 처음 사용 -
독일 슈파이어에 있는 대성당. 합스부르크를 중흥한 루돌프1세가 안치되어 있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독일 남서부, 프랑스와의 접경지역, 슈파이어(Speyer)라는 도시에 있는 대성당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붉은 색조의 사암으로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멀리서 보면 별로 크지 않을 것 같은데 실은 대단히 규모가 크다. 옆면으로 보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할 정도로 큰 선박과 같이 생겼다. 슈파이어 대성당의 앞에서 뒤까지의 길이는 무려 134m에 이른다. 건물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첨탑이 있다. 동탑은 높이가 71m이며 서탑은 66m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역사적으로 여러 면에서 유명하다. 두가지만 예로 들자. 첫째는 제국성당이라는 것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의 납골당에는 합스부르크를 중흥시킨 루돌프1세가 안치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독일제국의 제왕(황제)들이 무려 8명이나 안치되어 있다. 그래서 슈파이어 대성당은 제국성당(Kaiserdo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독일에는 이렇듯 제왕들의 유해를 집중적으로 안치하여 놓은 성당들이 몇 개 있다. 그중에서 슈파이어 대성당의 규모가 가장 크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의 납골당(영묘)은 규모가 넓기로 유명하다. 가로 35m, 세로 46m에 이르는 넓직한 곳이다.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독일의 제왕들은 다음과 같다.
- 콘라트2세(Conrad II): 1309년 서거. 기젤라(Gisela)왕비도 함께 안치
- 하인리히3세(Heinrich III): 1056년 서거. 콘라트2세의 아들
- 하인리히4세(Heinrich IV): 1106년 서거. 하인리히3세의 아들. 베르타(Bertha)왕바도 함께 안
- 하인리히5세(Heinrich V): 1125년 서거. 하인리히4세의 아들
- 베아트리스1세(Beatrice I): 1184년 서거. 프레데릭 바바로싸의 두번째 부인
- 슈봐비아의 필립 왕(King Philipp of Swabia): 1208년 서거. 프레데릭 바바로싸의 아들
- 루돌프1세(Rudolf I): 1291년 서거.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 나싸우의 아돌프 왕(King Adolph of Nassau): 1298년 서거
-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왕(King Albert of Austria): 루돌프1세의 아들
루돌프1세 석관 상부 조각
슈파이어 대성당이 둘째로 유명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보통 부르는 개신교(Protestantism)라는 용어가 이 곳에서부터 처음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여파로 생겨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 등등은 모두 개신교이다. 우리는 가톨릭이 아닌 신교를 개신교라고 부르지만 개신교라는 말 보다는 실은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교(抵抗敎) 또는 선언교라고 해야 합당할 것이다. 그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슈파이어이다.1529년의 일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Reformation)이 1517년에 일어났으므로 개신교라는 용어는 종교개혁 이후 12년만에 사용되기 시작한 셈이다. 1529년 가톨릭 실세들과 독일 제국의 일부 군주들이 슈파이어에 모여 제국 의회를 열고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의 활동 일체를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유명한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 치하에서였다. 원래 슈파이어 의회(Diet of Speyer)는 터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키 위해 모인 회의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추종하는 세력을 봉쇄키 위한 내용이 중심이 되었다.
이에 루터주의를 지지하는 군주들이 항의하며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분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적 운동을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주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루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사항에 항의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개신교도(Protestant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라틴어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유래한다. 선언(Declaration)이라는 뜻이다. 루터주의 군주들이 슈파이어 의회의 결정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5세에게 보낸 서한을 '선언서한'(Letter of Declaration)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원천이다. 샤를르5세 황제는 루터주의자 군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회유하고 포용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슈파이어 의회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페르디난트라는 측근을 대신 참석토록 했다. 골수 가톨릭인 페르디난트는 의회의 개막에서 샤를르5세 황제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루터주의자 군주들을 비난하고 제재해야 한다는 내용을 마치 황제의 메시지처럼 전하여 결국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샤를르5세(카를5세)
슈파이어는 독일연방 라인란트 주(Rheinland-Pfalz)에 속한 비교적 작은 도시이다. 라인란트 주의 수도는 마인츠(Mainz)이다. 슈파이어는 만하임(Mannheim)으로부터 남쪽으로 25km 떨어져 있다. 슈파이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을 통하여 라인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슈파이어바흐(Speyerbach)에서 연유했다. 인구는 5만명 정도이다. 하지만 역사는 장구한 편이다. 지난 1990년에 슈파이어 2천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슈파이어가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BC10년 경이다. 로마군이 병영을 세우고 주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슈파이어의 역사를 그 시점으로부터 계산하면 2천년이 넘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1981년) 슈파이어 대성당은 1050년 콘라트2세 독일 왕이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콘라트2세의 유해를 이 대성당에 안치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슈파이어는 라인강변에 있으며 프랑스와의 접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이 성행했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 유태인들은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일어나면서 이들에 의해 상당수가 학살당하였다. 13세기 초반까지 슈파이어는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추기경이 관할하는 도시였다. 그러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위세가 날로 높아지고 로마 교황청의 권세는 상대적으로 약해지자 신성로마제국은 슈파이어를 통치하던 가톨릭 추기경의 특권을 모두 박탈하고 이 도시를 독일 제국의 자유도시(Free Imperial City)로 지위변경하였다. 이후 슈파이어는 제국의 핵심 도시중 하나로서 1527-1689년까지 제국 의회의 본부 역할을 맡아 했다.
슈파이어 중심가. 멀리 슈파이어 대성당의 위용을 볼수 있다.
제1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는 1526년 열렸다. 루터주의자들이 가톨릭과는 별도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보는 것을 잠정 허용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황청이 '무슨 말도 안되는 결정을 했느냐?'고 난리를 쳤으며 아울러 독실표 가톨릭인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5세가 제국 의회의 결정사항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를 열고 '놀고 앉아 있네! 루터주의자들 같으니라구! 가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는 결코 인정할수 없도다!'라는 결정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슈파이어 대성당의 위용
슈파이어는 프랑스와의 접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여러번 곤욕을 치루었다. 1689년에는 프랑스의 루이14세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군대를 동원해 슈파이어를 침공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그후 10년 간에 걸쳐 겨우 재건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군이라는 작자들이 몰려와 대성당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의 마리 앙뚜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지 2년 후인 1794년의 일이었다. 슈파이어는 거의 50년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대성당에는 거미줄이 쳐진지 오래였다. 라인란트의 이웃인 바바리라의 루드비히1세가 '우리는 같은 식구!'라면서 거금을 희사하였다. 이 돈으로 우선 대성당을 재건하였다. 그래서 그나마 오늘날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슈파이어 대성당에 있는 루돌프1세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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