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구 레오폴드슈타트(Leopoldstadt)
레오폴드1세
레오폴드슈타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1세(1640-1705)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역이다. 레오폴드1세는 합스부르크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대로 두터운 입술과 긴턱,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약관의 18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독일왕, 헝가리왕, 보헤미아왕, 크로아티아왕, 오스트리아 대공에 즉위하여 무려 47년 동안을 재위했던 양반이다. 레오폴드 1세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으로서 개신교를 배척하였고 아울러 유태인들을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과거에 비엔나 시내에서 추방되어 운테레 베르트(Untere Werd: 베르트는 섬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번성하자 이들을 역시 추방하고 그 지역을 오스트리아 일반인들이 들어와서 거주토록 했고 유태인들은 아무 곳이나 가서 살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방 고마워하여 그 지역을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은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유태인들을 추방한 배경에는 레오폴드 1세의 황비인 스페인의 마르가레트 테레사(Margaret Teresa: 1651-1673)가 있었다고 한다. 마르가레트 마리아 테레사(또는 마르가레타 테레사, 마리아 테레사)는 골수 로마가톨릭이어서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성모 마리아를 괴롭혔다는 것을 생각하여 유태인들을 크게 증오하였다. 그러다가 비엔나로 시집을 오게 되자 남편 레오폴드 1세에게 베개송사하여서 비엔나 근교인 운테레 베르트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쫓아내도록 했던 것이다. 운테레 베르트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부르겐란트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편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레오폴드 1세의 처사에 대하여 고마워했다. 그래서 아예 마을 이름도 운테레 베르트에서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바꾸었다.
레오폴드 1세의 첫번째 부인인 스페인의 마르가레트 마리아의 어릴 때 모습. 이 그림은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 메니나스(La Meninas: 1656)에 포함된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벨리스케스의 라 메니나스는 서양화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잇는 것이다. 이 어린이가 커서 사촌 겸 삼촌인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하였고 유태인들을 증오하여서 운테레 베르트(지금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을 몰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오폴드슈타트는 과거에는 비엔나의 교외였으나 지금은 비엔나의 중심지역에 있다. 레오폴드슈타트는 20구인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와 더불어 비엔나 운하(Kanal)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에 면하여 있다. 그러므로 도나우에 둘러싸인 하나의 길다란 섬이라고 볼수 있다. 2000년 현재의 주민수는 약 10만명이다. 레오폴드슈타트는 1923년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이전에는 비엔나에서 유태인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레오폴드슈타트는 유태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마체스인젤'(Mazzesinsel)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체스 또는 마초(Matzoh)는 유태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먹는 무교병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체스인젤이라는 말은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마체스 떡이 있는 섬'이지만 비유적으로 '유태인 전용구역'이라고 풀이할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레오폴드슈타트를 마체스인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마체스인젤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자비형제단 성당
레오폴드슈타트의 명소는 무어라해도 프라터(Prater)이다. 프라터는 라틴어 프라툼(Pratum), 즉 초원(草原)이라는 뜻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원래 프라터 지역은 왕실사냥터여서 1766년까지 일반 시민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후 왕실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 지역을 대규모 놀이 공원으로 조성하여 모든 시민들이 즐길수 있게 했다. 우리가 보통 프라터라고 부르는 놀이 공원의 원래 명칭은 폴크스프라터(Volksprater: 국민프라터)이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부르스텔프라터(Wurstelprater)라고 한다. 부르스텔이란 말은 할레퀸 모습의 어릿광대를 한스부르트스(Hanswurst)라고 부르는데서 유래했다. 부르스트는 소시지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한스부르스트는 소시지처럼 뚱뚱하게 생긴 한스라는 이름의 어릿광대라는 의미의 말이 되었다. 프라터의 초입에는 대회전관람차(페리스 휠)인 '리젠라트'(Riesenrad)가 있어서 비엔나의 또 다른 랜드마크가 되어 있다. 리젠은 거인이라는 뜻이며 라트는 바퀴라는 뜻이다. 일찍이 1897년부터 운행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비엔나에서 리젠라트 1백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리젠라트는 영화 '제3의 사나이'(Der dritte Mann)로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끝없이 펼쳐진 프라터 대로 (하우프트알리). 휴일이면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롤러 스케이트 타는 청소년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된다.
프라터에는 릴리푸트반(Liliputbahn)이라는 꼬마 증기기관차가 있어서 눈길을 끈다. 꼬마기차는 프라터의 중심대로(Hauptallee)를 거쳐 멀리 에른스트 하펠 축구장(Ernst Happel Stadium)까지 운행한다. 프라터에 있는 대형 맥주집인 슈봐이처하우스(Schweitzerhaus: 스위스 오두막집)에서는 오리지널 체코산 부드봐이저(Budweiser) 생맥주를 서브한다. 슈봐이처하우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이 식당에서 프링글스(Pringles)와 같이 바삭바삭하는 감자 칩을 세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또한 슈봐이처하우스는 비엔나식 돼지족발로 유명하다. 이 식당의 부근에는 '쿠겔무겔 공화국'(Republic of Kugelmugel)이 있다. 1984년에 자칭 독립국임을 선포한 초미니 국가(마이크로네이션)이다. 건물이 공처럼 생겼기 때문에 쿠겔(대포알)이란 이름을 붙였다. 현재 공화국 시민들은 380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쿠겔무겔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프라터 더 알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레오폴드슈타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프라터 유원지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지나칠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는 정원을 기하학적으로 조성한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아우가르텐(Augarten)이다. 아우가르텐의 한 부분에 있는 홀에서는 예전에 아침음악회가 열렸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도 이 아침음악회에서 연주했다. 아우가르텐은 유명한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본부이며 또한 아우가르텐 도자기(Augarten-Porzellan)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아우가르텐에 아름다운 정원과 궁전건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나치가 일으킨 2차대전의 잔유물이 있다. 플라크(Flak)탑이라고 하는 거대한 대공포 진지이다. 비엔나는 플라크탑이 여러개 있었다. 그 중 노이바우에 있는 플라크탑은 전쟁이 끝나자 수족관으로 만들었다. 플라크탑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아우가르텐 편에서 비교적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참고 바란다.
아우가르텐 공원에 있는 아우가르텐도자기공장
아무래도 레오폴드슈타트와 유태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곁들여야 할것 같다. 17세기 중반까지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는 일부 지역만이 유태인 게토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을 뿐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임 베르트'(Im Werd)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임 베르트'라는 명칭은 '섬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비엔나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서쪽에 있는 보덴제(Bodensee)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보덴제에는 여러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이를 '임 베르트' 또는 베르트인젤(Werdinsel)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가 비엔나라는 큰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보덴제는 콘스탄스 호수(Lake Constance)의 독일어 명칭이다. 오스트리아 서쪽 끝의 포아아를베르크주에 있어서 독일, 스위스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호수이다. 임 베르트에서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유태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을 당시에는 '운테레 베르트'(Untere Werd)라고 불렀다. '아랫쪽 섬'이라는 의미이다.
보덴제의 베르트인젤. 레오폴드슈타트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이 지역을 임 베르트라고 불렀다. 발전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말하자면 시흥 또는 신촌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건대,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에는 17세기 중반부터 유태인 게토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헬러라는 랍비가 당국으로부터 이 지역에 유태인들이 자유스럽게 들어와서 살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비엔나의 중심지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점차 모여들어 유태인 사회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런데 레오폴드1세의 왕비인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문제였다. 스페인에 있을 때부터 가톨릭 골수였던 마리가리타 테레사는 비엔나로 시집을 오게 되자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쫓아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비엔나로 시집을 와서 남편인 레오폴드1세에게 밤이면 밤마다 유태인들이 '임 베르트'에 살고 있는 꼴을 못 보겠으니 어서 쫓아버리라고 얘기했다. 비엔나의 반유태인 사람들은 레오폴드 1세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자 왕비가 그런 훌륭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크게 환영하고 지시만 내리면 자기들이 앞장서서 유태인들을 쫓아내겠다고 말했다.
템펠가쎄 3-5번지에는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 이전에 비엔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나고그가 있었다. 무려 2천 2백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수 있었고 1천 5백명은 서서 예배를 드릴수 있는 곳이었다. 현재는 당시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여서 커다란 기둥 세개를 설치하여 잊지 않도록 했다. 이를 템펠조일레라고 부른다.
아무튼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덕택에 유태인 증오자가 된 레오폴드1세는 급기야 '임 베르트'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어디로든지 멀리 쫓아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임 베르트'에 있는 일반 주민들은 레오폴드1세의 이같은 위대한 조치를 크게 환영하고 유태인들이 당국에 의해 추방되자 마을의 이름을 원컨대 '레오폴드슈타트'로 변경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여 그렇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가 되자 제국의 동부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이 점차 레오폴드슈타트로 다시 몰려와 살기 시작했다. 비엔나에서 동부로 왕래하는 기차역인 북부역(노르드반: 현재의 프라터슈테른역)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동부로부터 오는 유태인들이 북부역 주변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체스인젤이라는 별명은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 지금의 포아가르텐(Vorgarten) 지역은 아직도 그때부터의 동구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곳이다. 아무튼 레오폴드슈타트에 유태인들이 다시 몰려와서 살기 시작하자 회당과 학교등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 이전에 비엔나 유태인들의 정신적 본부였던 쉬프 슐(Schiff Schul)도 건축되었다. 현재의 그로쎄 쉬프가쎄(Grosse Schiffgasse) 8번지에 있었다. 비엔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레오폴드슈타트 템펠(tlskrhrm)도 생겼다. 현재의 파즈마니텐가쎄(Pazmanitengasse) 6번지에 있었던 파즈마니텐템펠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탈무드와 토라를 주로 가르치는 유태교 학교인 예쉬바스(Yeshivas)도 있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교 회당 기념관. 1938년 11월의 크리스탈나하트에 파괴되었으나 크리스탈나하트의 75주년을 마지하는 2013년에 기념관으로 복구되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회당 기념관은 비엔나 ERSA의 정신적 센터이며 오스트리아저항운동(DOW)의 문서보관소이기도 하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복잡한 인네레 슈타트에 살기 보다는 레오폴드슈타트에 살기를 더 선호하였다. 시나고그와 코셔 식품점과 학교들이 들어섰고 예전의 슬럼과 같았던 게토들은 현대화되어 좋은 주택들로 모습을 바꾸었다. 유태인들은 집단을 이루어서 지내기를 선호한다. 나라없는 서름을 서로 모여서 지내며 조금이라도 풀어보자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유태인들은 집단사회를 이루면 자기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할 랍비를 둔다. 1625년에 비엔나의 랍비가 된 욤 토브 리프만 헬러(Yom-Tov Lipmann Heller)라는 분의 업적은 잊을수 없다. 헬러는 당국으로부터 레오폴드슈타트에 유태인 콤뮤니티의 본부를 설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헬러는 레오폴드슈타트를 새로운 유태인 구역으로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레오폴드슈타트에는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다. 지금도 거리에서 토요일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정통 유태인들의 모습을 자주 볼수 있다.
레오폴드슈타트회당(Tempel)은 비엔나에서 가장 큰 시나고그(회당)였다. 1858년에 건설된 이 회당은 특이하게도 무어(Moor) 스타일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었다. 그러나 1938년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이후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옛 모습을 찾아 볼수 없다. 비엔나의 이스라엘 문화협회는 그 자리에 기념 명판을 설치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Hier befand sich der Leopoldstaedter Tempel, der im Jahre 1858 nach Plaenen von Architekt Leopold Foerster im maurischen Stil errichtet und am 10 November 1938 in der sogenannten 'Reichskristallnacht' von der nationalsozialistischen Barbaren bis auf die Grundmauern zerstoert wurde." (이곳에 있던 레오폴드슈타트 회당은 1858년 건축가 레오폴드 회르스터의 설계에 의해 무어 스타일로 건축되었으나 1938년 11월 10일 이른바 나치 야만인들에 의한 '라이히스크리스탈나하트'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어 레오폴드슈타트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하나같이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를 타야했다. 한때 번창했던 유태인 사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고작 몇 명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요행으로 숨어지내다가 살아남을수 있었다.
도나우슈타트의 건물들이 배경에 보이는 레오폴드슈타트
1989년에 철의 장막이 걷히자 동구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비엔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프라터슈테른 역이 관문이었다. 소련에 살던 유태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에 살던 유태인들은 비엔나에 와서 주로 레오폴드슈타트에 정착했다. 코서 식품점이 늘어났고 회당도 새로 들어섰다. 폐허와 같이 우중충했던 집들은 새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층이 살던 레오폴드슈타트는 이제 새로운 부촌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8년에는 유럽축구챔피언쉽과 관련하여 지하철 2호선이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까지 연결되었다. 이제 레오폴드슈타트의 먼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지하철을 통해 쉽게 시내로 들어갈수 있게 되었으며 축구 팬들도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까지 쉽게 갈수 있게 되었다.
새로 단장하고 이름도 북부역(노르드반호프)에서 프라터슈테른 반호프로 바꾸었다. 동구에서 비엔나오 들어오는 관문이다.
레오폴드슈타트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프라터와 아우가르텐이다. 프라터에는 리젠라트(대회전관람차)가 있고 릴리푸트반이 있으며 비엔나 천문대와 프라터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물론 아기자기한 놀이터와 식당과 카페들이 있다. 프라터박물관은 칼스플라츠에 있는 비엔나박물관(Wiener Museum)이 운영하는 것이다. 아우가르텐에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있으며 아우가르텐도자기공장이 있다. 또한 벨베데레가 운영하는 오스트리아현대미술관있고 조각가로 유명한 구스티누스 암브로시의 전시해 놓은 미술관이 있다. 이밖에도 레오폴드슈타트에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가 저 유명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집이 있으며(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 현재는 기념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건설한 아름다운 성프란시스코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일명 멕시코교회라고 부르는데 이는 나치가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유엔 회원국으로서는 멕시코가 제일 처음으로 그같은 합병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기 때문이다. 레오폴드교회도 유명하며 프라터슈테른 기차역 앞의 오거리에 우뚝 서 있는 테게트호프 기념탑도 명물이다.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식 축구경기장이다.
레오폴드슈타트에서는 문화예술활동이 활발하다. 예전에는 레오폴드슈타트극장이었다가 칼극장(Carl-Theater)라고 이름을 바꾸었던 극장도 이곳에 있었다. 수많은 오페라와 오페레타, 연극이 초연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지금은 철거되어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네스트로이플라츠에 있었다. 레오폴드슈타트에는 박물관과 기념관이 많이 있다. Museum für Unterhaltungskunst는 서커스와 어릿광대 박물관이다. Museum des Blindenwesens는 소경박물관이다. Wiener Kriminalmuseum은 범죄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는 범죄박물관이다. 비엔나 경찰국이 지원하는 박물관이다. 타보르슈트라쎄 10번지의 큰 건물은 예전에 농산물시장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이다. 한때는 주식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1848년에는 오데온(Odeon)이라는 명칭의 극장겸 무도회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오데온은 비엔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도회장이었다. 한꺼번에 수천명이 입장할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연극, 무용, 음악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8년에 울리케 카우프만(Ulrike Kaufmann)여사가 창설한 세라피온스 앙상블(Serapions Ensembles)의 활동은 괄목할만 하다.
오데온의 무대와 객석. 고대 그리스의 공연장인 오데온을 본따서 만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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