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베치르크 점검

4구 뷔덴

정준극 2008. 4. 8. 18:02

4구 뷔덴 (Wieden)

 

  

칼스키르헤

 

4구 뷔덴의 역사도 오래 되었다. 뷔덴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으로 등장한 것은 1137년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뷔덴도 비엔나 성곽의 바로 밖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뷔덴의 중심가는 뷔드너하우프트슈트라쎄(Wiedner Haputstasse)이다. 페르디난트2세는 이곳에 여름 저택을 마련하여 지냈다. 그러나 저택이 협소하여 여러번 증축하였지만 흡족하지는 않았다. 마리아 테레자는 이 여름 저택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예수회에 매각하였다.

 

뷔덴의 아르겐티나슈트라쎄에 있는 ORF 방송국 건물

 

18세기에 들어서서 뷔덴을 비엔나 도시로 포함하는 개발사업이 시작되었다. 결과, 몇 채의 궁전과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성 안에 있던 훙겔브룬(Hungelbrunn) 및 샴부르거그룬트(Schamburgergrund)과 같은 미을이 뷔덴 구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뷔덴의 상당 부분이 마르가레텐 구로 분리되었다. 2차 대전후 뷔덴은 소련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칼 뤼거 박사를 기념하는 '칼 뤼거 플라츠' 

 

뷔덴에 살았던 인물로는 요한네스 브람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요한 슈트라우스2세, 모차르트와 인연이 많은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비엔나 시장을 지낸 칼 뤼거 박사(Dr Karl Leuger) 등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잘 알것이므로 칼 뤼거 박사에 대하여만 간단히 소개코자 한다.

 

뷔덴의 대로인 뷔드너하우프트슈트라쎄

 

칼 뤼거(Karl Lueger: 1844-1910)박사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대미를 장식하는 프란츠 요셉 황제 치하의 시기에 비엔나 시장을 지내면서 비엔나 시민의 생활수준 향상과 비엔나의 현대화를 위해 여러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예를 들어 그는 비엔나에 상수도를 설치하여 비엔나의 대부분 지역에 마시는 물을 공급하는 업적을 이룩하였고 비엔나의 대중 교통 체계를 정비하여 시 당국이 전차와 버스를 운영토록 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는 칼 뤼거 시장이 조성한 것이다. 그래서 중앙공동묘지의 아르 누보 교회를 뤼거 시장을 기념하여 칼뤼거교회라고 부른다. 비엔나 시는 뤼거 시장의 업적을 기려 링슈트라쎄의 일부 거리 이름을 '칼 뤼거 링'이라고 정했다.

 

칼 뤼거 시장 주최의 무도회, 라트하우스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7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Christian Social Party)을 창설하고 주도하여 당시 비엔나에서 세력을 구축하려던 독일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정권을 장악하였다. 1895년 칼 뤼거의 기사당(基社黨)은 비엔나 시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뤼거의 시장 진출을 유력하게 해주었다. 뤼거의 정치성향을 싫어하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그의 시장 취임을 세번이나 거부하였으나 결국은 승인하여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비엔나 시장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제1 공화국이 되었을 때(1918-1933) 엥겔베르트 돌푸쓰(Elgelbert Dollfuss) 등 우익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는 달리 적극적인 반유태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돌푸쓰, 이그나즈 자이펠, 쿠르트 슈스니그 등도 지나친 반유태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견제하였다.

 

뷔덴의 모차르트플라츠에 있는 모차르트 분수(Mozartbrunnen) . 오페라 '마술피리'의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