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베치르크 점검

23구 리징 (Liesing)

정준극 2008. 4. 12. 14:24

 23구 리징 (Liesing)

 

 

인처스도르프 마을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진. 프란체스카 돈너 여사는 인처스도르프에서 태어나 제네바의 유엔기구에서 통역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어나 영어로 된 사진설명이 없다. 한국대사관은 무얼하는 곳인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사진인지를 제대로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리징은 비엔나의 구 중에서 가장 마지막이다. 리징은 13구 히칭의 남쪽에, 12구 마이들링의 서쪽에 있다. 하여튼 리징이라고 하면 어딘가 비엔나의 남쪽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시골 구(베치르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리징은 비엔나 숲과 비엔나 베켄(Wiener Becken)의 끝자락에 퍼져 있는 비교적 넒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징에는 포도밭이 많이 있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줄어 들고 있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리징이라고 하면 전원적인 빌라들이 늘어서 있고 숲이 우거진 지역이며 곳곳에 주점들이 있어서 포도주를 마시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고속도로들이 얽혀 있고 상업지역이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별로 보기에 좋지 않은 벽돌 아파트군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오늘날의 리징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이웨이와 쇼핑 센터, 그리고 고층 아파트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한 현대식 지역이지만 리징의 과거를 돌아보면 오랜 역사가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000년이다. 그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에는 농가와 방앗간들과 귀족들의 시골 성채들이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대부분 두 차례에 걸친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파괴되었다. 터키가 물러나고 나서도 복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가 끝날 즈음에 리징은 단연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공장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징 알트 에얼라아에 있는 EKZ(아인카우프스첸트룸: 쇼핑 센터). 별 이상하게 지은 집도 다 있다.

 

19세기 당시에 리징은 운터리징(Unterliesing: 아랫마을)과 오버리징(Oberliesing: 윗마을)의 두 마을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방한 후에 행정구역 정리에 의해 두 마을을 모두 비엔나로 편입하여 하나의 구로 만들었다.  비엔나의 제25구였다. 이로써  비엔나시는 21개 구에서 26개 구로 확장되었었다. 비엔나의 새로운 구인 리징은 이어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15개 마을을 통합하였다. 2차 대전후 비엔나에 연합군이 들어왔고 리징은 소련의 통치아래 다시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비엔나 구획정리 때에 연합군측과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협의하여 아무래도 리징은 비엔나에 속하여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비엔나의 구로 재편입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리징은 브라이텐푸르트 바이 빈(Breitenfurt bei Wien), 라아브 임 발데(Laab im Walde), 푸르커스도르프(Purkersdorf), 페르흐톨드스도르프(Perchtoldsdorf), 뵈젠도르프(Vösendorf), 칼텐로이트게벤(Kaltenleutgeben)은 남부오스트리아로 이관되었다. 리징은 아츠거스토르프(Atsgersdorf), 에어라아(Erlaa), 인처스도르프(Inzersdorf), 칼크스부르크(Kalksburg), 마우어(Mauer), 로다운(Rodaun), 지벤히르텐(Siebenhirten)으로 구성될수 있었다.

 

프리츠 보트루바가 설계한 보트루바 교회. 교회가 아니라 조각작품이다.

 

마우어의 게오르겐베르크(Georgenberg)에 있는 보트루바(Wotruba)교회는 1974년 위대한 조각가 프릿츠 보트루바(Fritz Wotruba: 1907-1975)가 건설을 시작한 현대식 건물이다. 보르루바 교회의 원래 명칭은 ‘성삼위일체교회’(Kirche Zur Heiligsten Drefaltigkeit)이다. 보트루바는 교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보트루바는 프랑스의 샤트레(Chartres)를 방문하고 이곳이야말로 유럽의 정수를 대표하는 지형이라고 믿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보트루바는 비엔나 교외에서 샤트레와 흡사한 지형의 지역을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발견한 장소가 오늘날의 보트루바교회가 세워진 곳이다. 보트루바는 이곳에 자기의 예술혼을 판정받는 건물을 짓기로 작심했다. 그리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성 1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료 프릿츠 마이르(Fritz Mayr)가 교회를 완성했다. 교회건물은 마치 추상작품 같아서 이것이 과연 교회인지 놀라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조각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보르루바 교회는 152개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다.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3m에 이른다. 처음에 리징의 주민들은 괴이한 교회형태 때문에 저항감을 가졌으나 이제는 세계적 명소가 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2차대전중 나치의 무기고가 있었다. 오늘날 보트루바 교회에 올라서면 비엔나를 내려볼수 있으며 마르헨펠트(Marchenfeld) 너머까지 볼수 있다. 리징에는 세개의 성채가 있다. 슐로스 리징(Schloss Liesing), 슐로스 로다운(Schloss Rodaun: 베르크키르헤 로다운 옆), 슐로스 알터라아(Schloss Alterlaa)이다. 흥미로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감탄할만한 곳은 아니다. 알트 에얼라아(Allt Erlaa) 공원과 빌라 스타일의 호프만슈탈 슐뢰슬(Hoffmannsthal Schlössl)도 눈여겨 볼만한 곳이다.

 

리징 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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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태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1900-6. 15-1992. 3. 19)와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여사는 1900년 6월15일  비엔나의 인처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리징에 속한 지역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학교시절에 수학을 특히 잘아여서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을만큼 찬사를 받았다. 프란체스카는 비엔나에서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 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다. 프란체스카는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재능이 있었다. 또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교양있고 부유한 오스트리아 중산층 집안의 출신이었다. 프란체스카는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여행길에 제네바 레만 호반에 있는 뤼씨 호텔엘 묵은 일이 있었다. 마침 그 호텔은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식당에 들른 프란체스카와 어머니는 4인용 식탁에 앉았다. 잠시후 식사하기 위해 식당에 온 이승만 박사는 자리가 부족하여서 프란체스카가 어머니가 앉아 있는 자리에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참으로 인연이란 것은 우연찮게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이 박사는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서 급히 날라와 국제연맹 방송,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냈다. 이에 이승만 박사는 답례로서 프란체스카를 만나 차대접을 하였다. 다음날 프란체스카와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후 프란체스카는 인처스도르프에서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반갑게 재회할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에게 청혼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사랑하는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을 받으며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반지도 프란체스카가 준비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헌신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귀중한 타이틀과 함께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이 되었다.

 

인처스도르프 드라셰가쎄에 있는 인처스도르프초등학교(Volksschule Inzersdorf). 혹시 프란체스카 여사가 어릴 때에 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그런데 시골 학교 치고는 대단하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던 집은 23구 리징의 인처스도르프 마을에 있는 드라셰슈트라쎄(Draschestrasse) 51번지라고 한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전철 U1을 타고 종점인 로이만플라츠(Reumanplatz)에서 내려서 66번 버스를 타고 인처스도르프 프리드호프(Inzersdorfer Friedhof: 인처스도르프 공동묘지) 앞에서 내리면 약 20 미터 전방에 보이는 집이다. 이상의 정보는 오스트리아 대표 인터넷인 쿠쿠쿠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전에 양해도 받지 않고 글을 가져온 것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를 크게 존경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에서 쿠쿠쿠의 글을 상당부분 발췌한 것이니 양해해줄 것으로 생각한다. 쿠쿠쿠에 의하면, 한국의 어떤 분이 인처스도르프에 가서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물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찾아내고 탐방했다고 되어 있다. 자세한 글을 게재하여 주신 그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돈너. 1933년. 결혼식을 올리기 1년전.

 

다음은 영문 위키피디아에 기재된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소개 내용입니다. 서투른 솜씨이지만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름을 프란체스카, 돈너, 프란체스카 여사, 돈너 여사라고 혼돈되게 사용하였으나 정식으로 보면 프란체스카 여사라기 보다는 리 여사이다. 물론 돈너 여사라고 해도 크게 송구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프란체스카 마리아 바르바라 돈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한국어로는 프란체스카 도너: Peurancheseuka Doneo: 1900년 6월 15일생 - 1992년 3월 19일 서거)는 이승만의 두번째 부인으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훠스트 레이디(영부인)였다. 출생서류에 의하면 프란체스카 여사의 세례명은 독일어로 프란치스카 돈너(Franziska Donner)이다. 그러나 여사는 나중에 그의 이름을 공식문서에도 프란체스카 돈너(Franzeska Donner)로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스펠링은 이탈리아식으로 프란체스카(Francesca)였다. 이탈리아어 표기는 그의 여권을 비롯해서 모든 한국 서류에 그렇게 사용되었다. 돈너는 비엔나의 남쪽 인처스도르프 마을에서 태어났다. 인처스도르프는 1938년 비엔나에 통합되었다. 돈너는 제네바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서 통역원, 외교관, 연회의 주관자 등으로 일했다. 돈너는 1933년에 한국의 정치가인 이승만을 제네바의 어떤 호텔에서 만났다. 이승만은 미국에 거주하였지만 제네바를 회의 참섯차 방문하고 있었다. 얼마후 이승만은 오스트리아의 고향집에 잠시 돌아가 있는 돈너를 찾아가서 청혼을 하였다. 돈너는 이승만을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결혼식은 1934년 뉴욕에서 거행되었다. 두 사람에 모두에게 있어서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동작동국립묘지의 안내판. First Lady 다음에 왜 콤마는 찍었나? 콤마를 찍고 싶다면 First President 다음에도 찍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글로는 이승만 박사라고 했는데 영어로 번역한데에는 Dr 라는 표기가 없다. 국립묘지 관리하는 사람들은 간판의 번역을 간판가게에다가 맡기기만 했는가?

 

돈너와 이승만은 처음에는 뉴욕에서 살았으나 얼마후 워싱턴 DC로 갔고 그후에는 하와이로 가서 살았다. 하와이에는 한국으로부터 망명을 해온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돈너는 미국에서 이승만의 비서로서 일을 했다. 특히 이승만의 저서인 Japan Inside Out(1940)의 발간을 위해 일했다. 2차 대전에서 일본제국이 패전하자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1945년 10월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돈너는 몇 달 후에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1948년 3월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0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프란체스카 리'(Francesca Rhee)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훠스티 레이디(대통령 영부인)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거의 모든 공식행사에서도 남편과 함께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이 1960년에 하야하자 부부는 하와이에 정착했다. 돈너는 어느때 남편이 뇌졸증을 일으키자 그후부터는 남편의 옆에서 간호에 전념하였다. 그러기를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후 돈너 여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돈너 여사는 30년이 훨씬 지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5년을 지냈다. 돈너 여사는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와서 과거에 이승만의 저택이었던 이화장에서 양자인 이인수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돈너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카돌츠도르프에서 바라본 리징. 아직도 포도밭이 한적한 시골의 정겨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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