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란코론스키 (Palais Lanckoronski)

정준극 2008. 4. 21. 10:24
 

팔레 란코론스키 (Palais Lanckoronski)

 

팔레 란코론스키 조찬실

 

팔레 란코론스키는 1895년 카롤 란코론스키(Karol Lanckoronsku) 백작이 가족들을 위한 저택으로 지은 것이다. 네오 바로크 양식의 팔레 란코론스키는 큰길에서 조금 들어가 담장을 두르고 두 개의 문을 거쳐야 도달할수 있다. 팔레 란코론스키는 유명한 건축가인 페르디난트 펠너(Ferdinand Fellner)와 헤르만 고트리브 헬머(Hermann Gottlieb Helmer)가 공동으로 설계했다. 현관을 지나 나타나는 응접실에는 란코론스키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가 빽빽하게 걸려 있다. 란코론스키 백작은 미술품 수집가로서 이름 높았다. 팔레 란코론스키의 여러 방에는 귀중한 그림, 조각, 도자기, 가구들이 넘쳐 있어서 마치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롤 란코론스키 백작과 말고르차타 란코론스카 백작부인 그림(야체크 말체브스키 그림. 르비브미술관)

 

란코론스키 가문은 갈리시아(Galicia)에서 유래하였다. 란코론스키 가문은 대를 내려오면서 특별히 미술품 수집에 열성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을 중심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의 회화 작품들을 수집했다. 특히 렘브란트, 틴토레토, 카날레토 등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골동 조각품, 청동 예술품, 유리 미니에이쳐, 도자기 등도 수집하였다. 19세기에 있어서 란코론스키의 소장품은 비엔나 개인 소장품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 화가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 극작가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ahl),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등은 란코론스키 개인 미술관에 자주 들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종말을 고하자 란코론스키 백작은 폴란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상당수의 소장품을 갈리시아에 있는 선조때 부터의 장원으로 옮겼다. 란코론스키는 소장품의 대부분을 바르샤바 왕궁에서 사왔다. 1795년 폴란드가 분리될 때에 왕궁에 있었던 스타니슬라브 아우구스트 토니아토브스키(Stanislaw August Poniatowski) 왕이 소장했던 많은 미술품들을 경매하였고 이를 란코론스키 백작이 사들였던 것이다. 

 

팔레 란코론스키의 집무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나치는 유태인의 재산을 압수했을 뿐만 아니라 아리안 혈통이 아닌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재산도 압수했다. 체르닌(Czernin)소장품, 로스쉴트(Rothshild)소장품, 그리고 란코론스키의 소장품은 그런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압수한 소장품들을 독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매입한 예술품들은 독일로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나치의 실권자인 괴링이 특히 미술품에 관심이 깊어서 수많은 미술품을 은밀히 독일로 가져갔다. 히틀러의 지시도 괴링의 미술품 소유욕을 막지 못했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1년후 나치 친위대가 팔레 란코론스키를 압류하였다. 팔레 란코론스키에 있던 소장품들은 안전을 이유로 슐로쓰 호에넴스(Schloss Hohenems)로 옮겼다. 그러나 나머지 소장품들은 팔레 란코론스키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나중에는 사람들이 훔쳐갔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팔레 란코론스키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귀중한 문화유산이 절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복구하기도 힘들었다. 1960년대에 팔레 란코론스키를 완전히 허물고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호프만-라 로슈(Hoffmann-La Roche)를 위한 건물로 현재는 모토롤라 오스트리아 본사가 들어 있다.

 

팔레 란코론스키 응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