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 (Palais Niederoesterreich)

정준극 2008. 4. 21. 10:28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 (Palais Niederösterreich)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 헤렌가쎄 13번지

 

헤렌가쎄 13번지의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1980년 생 푈텐(St Poelten)이 남부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 남부오스트리아 주청사(Niederösterreichisches Landeshaus)였다. 1848년 3월 혁명당시 이 건물은 혁명세력의 연락본부였다. 혁명세력은 군대에 의해 와해되었다. 1997년 모든 관공서가 이전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현재는 행사장, 전시장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2004년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 인너 호프(코트야드)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비엔나 도심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물론 비엔나의 도심에는 수많은 슈타트팔레들이 있지만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그 역사성으로 인하여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비록 헤렌가쎄의 골목 길을 통해서 들어갈수 있어서 사뭇 감추어진 건물 같지만 오늘날 비엔나에서 전통과 역사가 현대 기술과 융합을 이룬 건물로서 이만한 규모의 건물은 찾아보기 힘든 입장이다. 잘 아는대로 전에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주정부청사로 사용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에 새단장을 하여 2005년 이후로는 회의장, 결혼식장, 무도회장, 연회장, 연주회장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 되었다. 메인 홀은 란트타그스잘(Landtagssaal)이라고 하여 거의 7백명을 수용할수 있는 이벤트 장소이다. 대규모 회의와 연회, 연주회 등이 열린다. 이밖에 리터잘(Rittersaal), 헤렌잘(Herresaal), 프랠라텐잘(Pralatensaal) 등이 있어서 다각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는 화려한 결혼식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화려한 바로크 궁전에서 갖는 결혼식은 평생을 잊을수 없는 이벤트가 되고 있다.

 

란트타그스잘에서의 회의. 화려한 바로크 회의장.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역사는 오래다. 16세기 중반에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부터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니더 외스터라이히 지방의 정치 대표자 회의 장소, 기사단 회의 장소, 도시 지도자 회의 장소, 의사당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중반 당시에는 니더 외스터라이히주가 아직 결성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여러 세력들이 대표자 그룹을 결성하였고 비엔나 시내에 있는 이곳에서 모임을 가져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 건물은 란트하우스(Landhaus)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란트하우스는 일반적으로 시골에 있는 귀족들의 별장을 말하지만 이 경우에는 지방정부 청사를 말한다. 그후 니더 외스터라이히 지방정부 청사로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니더 외스터라이히 지방 정부와 비엔나의 신성로마제국 정부가 가깝게 있기 위해서였다. 이건물에는 아직도 고틱 양식의 예배처 등이 남아 있어서 연륜을 말해 주고 있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대회의장은 바로크 시대에 새롭게 장식된 것으로 찬란한 벽장식은 영광과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다.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 코트야드에서의 이벤트

                   

니더 외스터라이히주 정부는 이 건물을 1861년 정식으로 인수하였다. 이같은 인수조치는 1848년 혁명의 후속조치로서 추진되었지만 실제로 인수되기 까지는 혁명으로부터 거의 20년이 더 지나야 했다. 1918년 10월 21일, 1차 대전 이후 새로 출범한 오스트로-독일 독립국가의 임시 의회가 이 건물에서 개최되었다. 1921년까지는 비엔나와 니더 외스터라이히주 국민대표부의 회의 장소로서 사용되었다. 그후 1922년 1월 1일에 비엔나가 독립적인 행정조직이 되자 란트하우스는 니더 외스터라이히주 정부의 소관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1997년 니너 외스터라이히 주정부가 장크트 푈텐으로 이전하기까지 니더 외스터라이히는 주정부청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복구 공사는 2002년부터 착수하여 2004년에 마무리하였다. 그리하여 2005년에 니더 외스터라이히로서 새로 태어났다.

 

헤렌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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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렌가쎄의 궁전들]

프라이융에서부터 로브코비츠플라츠까지의 거리는 중세에 호흐슈트라쎄(Hochstrasse)로 알려졌었다. 비엔나가 제국의 수도로 확장되자 각지의 귀족들이 비엔나로 몰려와 살게 되었다. 이들은 특히 황제가 살고 있는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가까운 곳에 저택을 마련하여 살기 시작했다. 독일어에서 ‘귀족들’은 ‘헤렌’(Herren)이므로 이 지역을 헤렌가쎄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렌가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513년 이곳에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들어선 후부터였다.


헤렌가께에 건설된 팔레들의 특징은 현관이 거리에 바짝 면하여 있고 정원은 사람들의 눈길에서 벗어나 건물의 뒤편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팔레는 복수 입구를 마련하여 다른 거리에서도 들어 갈수 있게 하였다. 헤렌가쎄 8번지에 있는 팔레 리히텐슈타인은 유명한 뵈젠도르퍼-콘체르트잘(Beosendorfer-Konzertsall)이 1872년 문을 열어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요셉 헬메스버거(Joseph Hellmesberger),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uellow) 등이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러나 팔레 리히텐슈타인은 1913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헤렌가쎄의 팔레 모데나


1918년 1차대전이 끝나는 것과 함께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몰락하였고 2차대전이 끝나자 이곳에 팔레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높은 유지관리비 때문에 팔레들을 포기해야 했다. 귀족의 가족들은 팔레를 세를 주었거나 정부에 매각하였다. 일부 팔레들은 박물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렌가쎄에는 중세로부터의 아름다운 팔레들이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바로크와 네오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헤렌가쎄에서 현재까지 존립하고 있는 팔레들은 다음과 같다.


- 팔레 헤르베르슈타인(Palais Herberstein): 헤렌가쎄 1-3번지. 1897년 건축

- 팔레 빌체크(Palais Wilczek): 구 팔레 렘브루흐(Palais Lembruch): 헤렌가쎄 5번지. 1737년

- 팔레 모데나(Palais Modena): 현재 내무성 청사. 헤렌가쎄 7번지. 1811년

- 팔레 몰라르트-클라리(Palais Mollard-Clary): 헤렌가쎄 9번지. 1689년

-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Palais Niederoesterreich): 전 Niederoesterreichsches Landeshaus. 헤렌가쎄 11번지. 1839-1848년

- 팔레 훼르스텔(Palais Ferstel):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은행. 헤렌가쎄 14번지. 입구는 프라이융 2번지. 1856-1860년

- 팔레 바티야니(Palais Batthyany): 전 Palais Orsini-Rosenberg의 일부. 헤렌가쎄 19번지. 1716년

- 팔레 트라우트만스도르프(Palais Trauttmannsdorff): 헤렌가쎄 21번지. 1834-1838년

- 팔레 포르치아(Palais Porcia): 헤렌가쎄 23번지. 1546년


헤렌가쎄의 다음은 프라이융 광장이다. 귀족들의 팔레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근처의 다른 지역으로 귀족들의 팔레가 많이 들어서 있던 곳은 미노리텐플라츠(Minoritenplatz)이다.

 

16세기 중반 팔레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