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로트쉴트 (Palais Rothschild)

정준극 2008. 4. 22. 17:07

 팔레 로트쉴트 (Palais Rothschild)


세계적 은행가인 로트쉴트 비엔나 가문은 비엔나에 세채의 팔레(시내궁전)를 건설하였다. 비엔나의 팔레 로트쉴트들은 아름답고 우아한 건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도 소장된 예술품으로 더 유명하다. 팔레 로트쉴트에 소장된 예술품들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후 모두 압수되었고 건물들은 반유태주의자들에 의해 파손되었다. 게다가 2차 대전중 폭격으로 손상을 입기도 했다. 로트쉴트 가문은 이들 팔레들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 매각하였다. 얼마후 그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팔레 로트쉴트의 역사는 오스트리아 유태인들의 흥망성쇠와 맥을 같이한다. 팔레 로트쉴트로는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1),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II)가 있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드
           

-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Palais Nathaniel Rothschild): 현재 원래의 팔레 모습은 찾아 볼수 없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인 노동회의소(Labour Chamber)가 들어섰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1836-1905)는 유명한 알베르트 살로몬 폰 로투쉴트의 동생으로 1871-78년 프랑스 건축가인 장 지레트(Jean Girette)에게 의뢰하여 비엔나에 프랑스 네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는 2층의 단아한 건물이지만 정원은 분수들과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서 화려하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는 로트쉴트 가문의 영화와 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나타니엘 남작은 대규모 무도회를 개최하였다. 무도회에는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비엔나 사회의 유명한 교수들과 경제인들이 참석하여 궁정에서 베푸는 연회에 버금하는 화려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고대악기 수집가로 유명했다. 이날 무도회에서는 그가 그동안 수집한 고대 악기들을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토록하여 관심을 끌었다. 나타니엘 백작은 자선사업과 구호사업을 펼쳐 존경을 받았다.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이후 나타니엘 가족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팔레를 비롯한 재산은 모두 압수되었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에는 게슈타포(Gestapo)가 들어와 유태인 심문장소로 사용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팔레 나타니엘 로트쉴트는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파괴된 잔해중 석재들은 비엔나의 다른 건물의 보수에 사용되었다. 일부 석재는 슈테판 대성당의 보수에 사용되기도 했다. 유태인의 집 주춧돌이 가톨릭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었다. 전쟁후 비엔나로 돌아온 나타니엘 남작의 상속자인 클라리스 드 로스쉴트(Clarice de Rothischild) 남작부인은 팔레를 도무지 경영하기가 어려원 오스트리아 노동당에게 매각하였다.  

 

데이비드 테니어스의 Erzherzog Leopold Wilhelm in seiner Galerie in Brüssel(브뤼셀 화랑의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 로트쉴트 가문의 소장이었으나 현재는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 소장.


-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Palais Albert Rothschild): 로트쉴트 가문의 알베르트 폰 로트쉴트 남작이 지은 팔레이다. 이 팔레는 비엔나의 일반적인 팔레 스타일에 비하여 크게 특이하다. 프랑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이다. 더구나 일반적인 사각형 스타일이 아니라  U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큰길에서 안쪽으로 건물 앞에 넓은 정원을 두어 여유를 보여주었다.  

 

프린츠 오이겐슈트라쎄 26번지의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드. 현재는 브라질대사관. 2차 대전 중에는 게슈타포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에서 가장 특색있는 것은 무도회장에 설치된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이다. 오케스트리온은 오케스트라와 같은 여러 소리를 내는 대형 악기이다. 무도회장과 다른 살롱을 연결하는 곳에 또 다른 작은 오케스트리온이 있다. 이 두 오케스트리온은 전체 오케스트라를 대신할 정도의 음향을 낼수 있다. 알베르트 남작은 이 건물을 사교모임뿐만 아니라 은행사업을 하는 중심지로 활용했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소규모이지만 천체관측소를 설치한 것이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로트쉴트 가족들도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아 영국으로 도피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유태인 미술 소장품인 귀중한 로트쉴트 소장품에 눈독을 들였다. 나치는 루이 로트쉴트(Louis Rothschild)의 소장품인 고가의 귀중한 그림, 조각, 갑옷, 동전, 서적, 가구 등을 테레지아눔가쎄의 팔레에서 꺼내 차지했다. 나치 게슈타포는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를 비엔나 게슈타포 본부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이른바 Zentralstelle fuer jeudische Auswanderung(유태인 집단 이주 중앙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유태인들을 제3국으로 이민가도록 주선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사정은 달랐다. 아이히만은 이민을 가고자 하는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받아 챙기면서 이민허락을 차일피일하였다. 결국 유태인들은 나치가 달라는 대로 다 바쳤지만 거의 모두 제3국행 열차를 타는 대신 강제수용소행 기차에 올라탔다. 알베르트의 동생인 루이스도 다카우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알베르트는 동생을 석방하여 제3국으로 갈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치가 원하는 대로 모든 미술소장품을 비롯하여 자산을 독일 정부에 헌납한다는 약정서에 서명했다. 이로부터 모두 260여 점의 값으로 환산할수 없는 미술품이 나치에게 압수당했다. 원래 미술학도였던 히틀러는 미술품에 깊은 관심을 가져 그중에서 122점을 특별히 선정하여 그가 구상하고 있는 린츠(Linz)미술관에 전시할 계획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 이민계획이 마무리되고(Endloesung) 유태인 사회가 와해되자 게슈타포 본부는 더 이상 역할이 없었다. 게슈타포 책임자인 아이히만은 다른 지역으로 전보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집단학살 임무를 맡았다. 팔레의 자리에는 나치 치하의 우편전신국이 들어섰다.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는 전쟁중에 일부만 파손되었지만 가구를 비롯하여 장식품들은 거의 모두 나치가 약탈해 갔다. 루이스 로트쉴트가 찾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그로부터 루이스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나치가 약탈해 간 예술품에 대한 것과 은행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관료적인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런 저런 이유로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아마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더더구나 협조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내 루이스 남작은 경직된 정부의 처사를 한탄하며 작은 보상만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관리비를 충당할 길이 없었다. 루이스 남작은 궁전들과 정원과 장원들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헌납하였다. 단, 그의 종업원들이 해고되지 않고 궁전과 정원의 관리원으로 계속 남아 있으며 다른 오스트리아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연금을 받을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그나마 인정을 받았을 뿐이다.

그후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는 해체되었다. 샹들리에와 귀중한 목재등은 도로테움에서 경매에 붙여져 헐값에 매각되었다. 계단과 대리석 기둥들은 이탈리아인에게 팔렸다. 나머지 석재들은 그저 파손되었다. 장식 철재 등은 절단되어 따로따로 팔렸다. 대형 오케스트리온은 일부만 파손되었지만 철거키로 했다. 오케스트리온의 일부는 미술사박물관 소속으로 노이에 호프부르크(Neue Hofburg)에 있는 고대악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중에 팔레를 완전히 철거할 때에는 워낙 견고하게 건설했기 때문에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해야 했다.


팔레 로트쉴트의 현관 조각

 

- 팔레 (알베르트) 로트쉴트 II: 알베르트 폰 로트쉴트는 첫 번째 팔레가 있는 프린츠-오이겐 슈트라쎄에 두 번째의 팔레 로트쉴트를 지었다. 프린츠-오이겐 슈트라쎄 26번지이다. 1894년 극장건축가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펠너(Ferdinand Fellner)와 헤르만 헬머(Hermann Helmer)의 설계로 건축되었다. 이 팔레도 다른 유태인 재산과 마찬가지로 나치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다. 그러나 건물 자체는 거의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다. 현재 이 건물은 브라질 대사관이다.


[로트쉴트 소장품]

루이스 남작과 알폰스 드 로트쉴트는 나치에게 빼앗겼다고 소재를 파악하여 반환을 청구한 자기들의 예술품들을 손에 넣지 못하고 결국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넘기지 않을수 없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법들과 수많은 서류들 때문에 빼앗긴 예술품들을 돌려 받거나 또는 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로트쉴트 가문의 후손들은 파산이후 그나마 남아 있는 예술품들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거의 강제적으로 팔아야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 자신도 나치의 희생물이라는 주장 때문에 피해자인 유태인들이 역시 피해자인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피해보상 재판 법정의 재판관들은 거의 모두 전직 나치들이었다. 그들이 유태인을 위해 유리한 판결을 내려줄 리가 없었다. 로트쉴트 가문의 예술품들은 거의 모두 미술사박물관이나 벨베데레의 오스트리아 갤러리 소유가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치가 저지른 약탈행위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 지루한 협상과 논쟁 끝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마침내 나치가 약탈해 갔던 로트쉴트 가문의 예술품으로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 소유로 되어있는 약 250점을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로트쉴트 가문이 이들 예술품을 돌려받기 까지는 10년도 더 걸렸다. 예를 들면 다비드 테니어스(David Teniers)의 ‘브뤼셀의 화실에 있는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Erzherzog Leopold Wilhelm in siener Galarie in Bruessel)등이다. 그러나 나중에 로트쉴트 가문은 이들 귀중한 예술품들을 미술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