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뫼들링(Mödling)의 베토벤

정준극 2008. 4. 29. 16:58
뫼들링(Mödling)의 베토벤


베토벤의 시기에 뫼들링은 약 3백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시장마을이었다. 베토벤은 1799년, 그가 29세 때에 처음으로 뫼들링을 찾았다. 다음에는 1818-1821년에 여름이면 찾아 왔었다. 뫼들링의 하우푸트슈트라쎄(Hauptstrasse) 79번지에는 베토벤이 1818-1819년 여름에 이 집에서 작곡하며 생활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하프너하우스(Hafnerhaus)라고 불리는 이 집은 현재 베토벤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하프너하우스라는 말은 질그릇 만드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방 셋을 썼다고 한다. 베토벤은 적어도 다섯 작품을 이 집에 머물면서 동시에 작곡을 착수했다고 한다. 뫼들링 무곡, 장엄 미사곡, 교향곡 제9번, 파이노 소나타 29번(Hammerklavier), 그리고 디아벨리(Diabelli)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나중에 브람스도 그랬지만 베토벤도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곡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뫼들링의 하프너하우스 앞에 있는 베토벤 흉상


1818년 런던의 브로드우드(Broadwood)피아노 제작자가 베토벤에게 피아노 한 대를 기증하여 보냈다. 이 피아노는 런던에서 배편으로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를 거쳐 다시 육로로 비엔나에 도착하는 대장정을 통하여 배달되었다. 그래서 런던에서 비엔나까지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베토벤이 이 피아노를 받은 것은 뫼들링의 하프너하우스에 거주하고 있을 때였다. 하프너하우스는 1970년 6월, 베토벤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여 뫼들링 구청이 인수하였다. 이후 하프너하우스는 프랑스, 미국, 일본의 베토벤에 대한 영화촬영 장소로서 많이 이용되었다. 베토벤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베토벤의 집도 이곳이다. 

 

 

 

하프너하우스 통로


베토벤이 1820년에 뫼들링을 방문했을 때에는 바벤버거슈트라쎄(Babenbergerstrasse) 36번지의 아우구스티너호프(Augustinerhof)에 머물렀다. 현재 이 건물은 아흐제나우가쎄(Achsenaugasse) 6번지로서 크리스트호프(Christhof)라고 불린다. 이 집에도 베토벤이 체류했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크리스트호프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집주인에게 말만 잘하면 구경시켜 줄수도 있다. 크리스트호프라는 명칭은 베토벤 당시에도 그렇게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베토벤이 장엄미사곡을 스케치한 종이에 Do'tag, Azgtg, Christ 라는 암호와 같은 글을 적어 놓았는데 훗날 학자들이 풀이해 본 결과 Donnerstag. auszugtag. Christhof (목요일. 이사날. 크리스트호프로)일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뫼들링의 베토벤산책길(Beethoven Wandenweg) 안내 표지


베토벤의 가장 독특한 성격중의 하나는 그가 자라온 음악적 맨너이다. 대부분 작곡가들은 어느 수준에 이르러 음악적으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음악적으로 상승을 계속하였다. 그는 음악이라는 마터호른(Matterhorn)에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전혀 새로운 정상을 창조했다. 그의 몇몇 작품들, 특히 실내악 작품들은 청중이나 연주자들 모두를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들리지 않는 사람의 음악적 중얼거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교향곡 제9번은 단 두 번의 리허설 후에 초연되었다. 심지어 대부분 연주자들은 악보를 처음 받아보고 연주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연주자들은 대단한 집착력으로 연주를 해야 했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작품과 실내악들은 연주자들이 연주를 거부할 정도로 당시 음악적 패턴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작품들은 같은 시대의 작곡가들의 성향과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거부감마저 주었다. 베토벤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때 바이올리니스트인 라디카티(Radicati)가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의 음악적 의미에 대하여 문의하자 베토벤은 주저함 없이 ‘아, 그건 당신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후세들을 위한 것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의 일반적인 양상을 떠난 급진적인 사고방식의 작품들이었다. 또 어느 때는 사람들이 베토벤에게 그의 작품이 별로 호감을 주고 있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베토벤은 ‘언젠가는 좋아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사람들이 그의 후기 작품들을 이해하고 좋아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베토벤이 서거한후 거의 반세기 후에 가서야 사람들의 그 작품들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경우는 말러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말러의 교향곡에 대하여 난해하다는 투로 얘기하자 말러는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의 교향곡은 그 때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크리스트하우스에 붙어 있는 기념명판. 베토벤이 '장엄미사'를 창조한 곳이라고 써 있다.

                   

같은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에 비하여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은 어쩌면 이상하거나 소란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그의 마지막 현악4중주곡들, 그리고 그의 대푸가(Grosse Fuge)가 그렇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이들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현대작품이다. 그리고 영원히 현대작품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들은 당시에 연주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물론 듣기에도 어려웠다. 더구나 그가 손으로 적은 악보들은 누구든지 읽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20세기의 현대음악을 부담 없이 듣고 있다. 그러므로 베토벤의 음악은 더 이상 새로운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토벤의 음악은 고전적이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베토벤 당시에 그의 음악은 현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은 다음 세기의 여명(黎明)을 준비해 주는 것이었다.  

 

뫼들링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