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비엔나의 교회들

2구 카멜리터키르헤(Kameliterkirche)

정준극 2008. 5. 19. 18:49

카멜리터키르헤(Kameliterkirche) - 갈멜교회

  카멜리터플라츠 5번지


카멜리터교회(갈멜교회)


갈멜교단이 처음 비엔나에 들어온 것은 1360년 루돌프 대공이 인정해서였다. 바벤버그 왕조의 루돌프 대공은 비엔나를 개설한 인물이다. 비엔나에 들어온 갈멜교단은 1386년 현재의 암 호프(AmHof)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서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갈멜교단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암 호프의 갈멜교회는 예수회에 넘겨주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1백년쯤 지나서인 1620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로마가톨릭을 수호하는 의미에서 갈멜교단을 다시 비엔나에 불러 들여 활동할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암 호프의 옛 갈멜교회는 이미 예수회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새로 비엔나의 교외, 현재 레오폴드슈타트의 카멜리터플라츠(Kameliterplatz)에 땅을 주어 교회와 수도원을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1639년 오늘날의 갈멜교회가 봉헌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갈멜교회는 성요셉 교구교회(Pfarrkirche St Joseph)라고도 불린다. 성요셉에게 봉헌했기 때문이다.

                       

카멜리터교회 중앙제단


갈멜교회(성요셉교구교회)는 터키의 비엔나 공성때에 큰 피해를 입었다. 비엔나 성곽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군은 교회를 파괴하고 수도원을 불살라 버렸다. 터키군이 물러간후 복구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종전의 교회 위치를 약간 변경하여 현재 카르멜리터플라츠에 있는 삼위일체기념비 앞쪽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교회는 계속 수난을 당하였다. 나폴레옹의 비엔나를 점거했을 때 큰 피해를 보았으며 1830년에는 도나우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어 1848년에는 혁명으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루어야 했다. 교인들은 어쩔수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 1901년 남아 있던 교인들을 규합하여 갈멜교단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난은 계속되어 2차 대전중에도 심한 포격을 받아 교회의 상당부분이 파손되는 운명을 겪었다. 하지만 갈멜교단의 집념도 끈질겨서 1961년 교회를 완전히 재건하고 그해 12월 7일 감격스러운 봉헌미사를 드렸다.   

 

되블링의 카멜리터클로스터(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