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수원

신갈과 갈천

정준극 2008. 7. 3. 19:20

신갈과 갈천

 

사변후 상당기간 동안 현재의 신갈은 경기고 용인군 기흥면에 속해 있었다. 신갈리는 갈천(葛川)을 끼고 있는 조용한 마을이었으나 일제시대에 남수원에서 여주까지 수여선(水麗線)이 개통되고 신갈에 정거장이 생기자 점차 부산해지기 시작한 마을이다. 갈천을 안고 있는 마을들은 상갈리, 하갈리, 구갈리, 신갈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자갈밭의 갈천에는 칡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갈천(갈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린 우리들은 '신갈 가자'는 말을 '갈내 갈래'라고 말하며 웃었다. 6.25 당시 외삼촌은 신갈리에서 작은 정미소를 운영하셨다. 사변이 터지자 우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피난길에 올랐는데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여동생과 함께 신갈 외삼촌 집으로 일단 피난하였다. 어머니는 공산군이 설마 신갈까지 밀고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며칠 지내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갈에서 9.28 수복이후까지 죽을 고생을 하며 지냈다.

 

 신갈의 갈천. 예전에는 집들이 하나도 없었고 자갈 밭이었다.

 

외삼촌 집은 지금의 신갈 오거리에서 용인 쪽으로 2-3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외삼촌 집의 앞길은 금랑장과 백암, 용인으로 가는 신작로였고 집 뒤편에는 갈내(갈천)가 있는 듯 없는 듯 그럭저럭 흐르고 있었다. 말이 갈내이지 물이 말라서 도무지 깊은 곳이 없는 냇갈이었다. 당시에 나는 갈천이 흘러흘러 신갈저수지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보다도 신갈저수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저수지라고는 쇠푼리라는 곳에 있는 조기정방죽 뿐이었다. 사변나던 해의 7월은 더할수 없이 덥고 비가 오지 않아 모두가 메말랐었다. 조기정 방죽의 물도 거북이 잔등이 처럼 바닥을 보였다. 그래서 외사촌들과 함께 방죽에 들어가 멀거니 누워있는 몇마리의 붕어들을 양동이에 주워 담아 집으로 가져와서 끓여 먹었다.

 

신갈오거리에서 용인 쪽으로 본 구길(지금은 확장되어 넓고 모두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사변이야기와 피난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하지만 신갈과 관련하여 이 얘기는 꼭 남기고 싶다. 앞서도 얘기한대로 아홉살의 나는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신갈의 외삼촌 집에 피난 갔었다. 그해 7월 어느날, 외삼촌 집으로 갑자기 인민군 두세명이 들이 닥쳤다. 서슬이 퍼런 인민군들은 우리 어머니가 반동이라면서 잡아가려 했다. 인민군에게 반동이라는 죄명으로 끌려가면 인민재판을 받아 결국은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며칠전에도 순경하던 사람의 어머니가 반동이라는 구실로 붙잡혀가서 인민재판을 받아 동리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아무리 어린 나이였지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짐작할수 있었다. 인민군들이 어머니의 양손을 뒤로 돌리고 철사줄로 꼭꼭 묵어 데리고 가려하자 나는 눈 앞이 캄캄할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땅바닥만 내려다 보시고 계셨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민군들이 어머니를 잡아 가려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해방후에 수원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셨는데 그때 공산당을 많이 비판하시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에서는 홍아무개라는 사람과 아버지가 대등하였는데 결국 돈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못한 아버지께서 낙선하시었다. 당시 수원에서는 '말잘한다 정아무개, 먹고보자 홍아무개'라는 말이 나돌았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조리있게 연설을 잘 하시어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지만 홍아무개는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사주고 고무신을 사주고 담배를 사주어 결국 표를 긁어 모았다. 아무튼 평소 반공이신 아버지였기에 빨갱이들이 침략해오자 이에 부화뇌동하던 어떤 자가 어머니의 소재를 알고 인민군에게 고발하여 인민군들이 어머니를 잡으로 들이 닥쳤던 것이다. 외삼촌이 인민군들에게 사정사정했지만 빨갱이들은 막무가내며 데려가겠다고 했다. 누가 어린 우리에게 어머니를 붙잡고 울며 불며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를 붙잡고 그저 울며 가면 안된다고 했다. 결국 동리의 여러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죽어라고 사정하고 술을 대접하며 돈을 집어주자 인민군들은 다음에 보자고 하면서 가버렸다. 까딱했으면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기 인민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뻔 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길 오른쪽에 외삼촌의 집과 정미소가 있었다. 지금은 무슨 빌라를 크게 짓고 있다. 상전벽해. 

 

950년의 여름. 유난히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흘렀다. 모기들은 왜 그렇게도 극성이었는지! 밤에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며 모기를 쫓았다. 모깃불은 보통 쑥대로 피웠다. 쑥대는 하루 전날 꺾어서 말려 두면 잘 탔다. 모기의 극성 때문이 아니라 모깃불의 연기 때문에 더 잠을 잘수 없었다. 공산당 치하의 피난 시절! 무엇을 먹고 살았는가? 밀기울밥을 자주 먹었다. 밀기울은 밀을 빻은 후에 나오는 꺼칠꺼칠한 찌꺼기를 말한다. 외삼촌 댁이 방앗간이었으므로 간혹 밀을 도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밀기울을 구하여 밥을 해 먹었으니 깔깔해서 목에 쉽게 넘어가지가 않았다. 호박닢을 따다가 소금 넣고 끓여 먹는 때도 많았다. '그 정도면 관찮네!'라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나 밥 없이 호박닢 국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일손이 부족하여 어린 나도 외삼촌 논에 나가 벼를 심고 물길을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해에는 날이 하도 가물어서 7월 초에야 겨우 논에 물을 대어 벼를 심을수 있었다. 논에 거머리가 너무 많아 무척 고생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기누양말이라도 있었다면 거머리가 다리에 붙는 것을 막을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신갈초등학교. 6.25 당시에는 빨갱이들의 사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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