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화신: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푸치니와 엘비라와 아들 안토니오(빌라 푸치니에서)
모르긴 해도 세계적인 작곡가의 부인중에서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만큼 질투심이 대단했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엘비라는 어찌나 푸치니를 들들 볶아대고 체면을 구겨주었던지 불쌍한 푸치니는 결국 제명에 인생을 마감하지도 못했다. 만일 푸치니의 부인이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인 페피나처럼 대단히 내조적인 여인이었고 아울러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면 푸치니는 몇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는 역사의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다 아는 대로 푸치니는 자수성가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불행하게도 다섯 살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저 그런 음악가였던 푸치니의 아버지는 어린 푸치니도 어릴 때부터 '너는 이 아버지처럼 되지 말고 음악공부를 열심히 해서 유명한 음악가가 되거라'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어린 푸치니는 음악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었다. 푸치니가 음악에 재능을 보이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은 온전히 그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런 푸치니의 어머니도 푸치니가 26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푸치니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중에 푸치니는 어머니 알비나(Alvina)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엘비라(Elvira)와의 애정도피 사건을 일으켰다고 털어 놓을 정도였다.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
엘비라는 누구인가? 엘비라는 푸치니와 같은 고향인 루카 출신으로 푸치니보다 두 살 아래인 24세이며 키가 크고 풍만한 몸매를 가진 미인형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푸치니와는 어릴 때 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사이였다. 엘비라는 고향 루카에서 식품점을 경영하는 제미냐니(Geminagni)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살았다. 엘비라는 루카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 푸치니로부터 성악과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엘비라의 남편이 기왕이면 아는 사람에게서 레슨을 받으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고 엘비라가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남들처럼 피아노나 간단히 칠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레슨을 받은 것이다.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두 사람은 이성으로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고 결국은 사랑하느니 어쩌니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후 푸치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엘비라는 용감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하여튼 집을 나와 푸치니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엘비라는 딸이 둘이나 있었다. 엘비라는 그 중에서 딸 하나를 데리고 푸치니의 집으로 들어왔다. 엘비라는 남편과 이혼할 수가 없었다. 가톨릭에서는 이혼금지이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친척들은 푸치니에게 가문에 먹칠한 못된 놈이라고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푸치니는 사랑을 내세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엘비라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와 애인과 동거를 시작한 파렴치한 여자라고 비난하였다. 엘비라는 그런 비난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대단한 엘비라였다. 동거를 시작한지 2년후인 1886년(한국에서는 고종황제가 배재학당의 설립을 인가한 해),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로서 아들을 얻었다. 푸치니의 장남 안토니오(Antonio)이다. 푸치니의 자녀로서는 안토니오가 유일하며 포스카(Fosca)는 엘비라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중 하나이다. 푸치니는 포스카를 친딸 이상으로 보살펴 주었다. 나중에 푸치니는 포스카가 결혼하여 낳은 딸을 특히 사랑하였다.
푸치니와 엘비라가 살았던 루카 마을
함께 살며 아들 안토니오도 낳았지만 푸치니와 엘비라는 정식 부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동거를 시작한지 20년후인 1904년이었다. 엘비라의 법적인 남편인 식료품점 주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식적인 혼인신고를 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쯤해서 푸치니는 '라 보엠', '토스카' 등의 계속적인 히트로 인기절정이었다. 푸치니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팬이라는 미명아래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게다가 푸치니는 정말 잘생긴 멋쟁이였다. 아마 역대 작곡가중 푸치니만큼 잘 생긴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연유때문인지 푸치니는 1924년 6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40년동안 엘비라의 끔찍한 질투 때문에 온갖 수모와 곤혹을 다 겪으면서 살아야 했다. 푸치니는 엘비라 때문에 정말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푸치니는 변변한 스캔들을 한번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만큼 엘비라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래도 엘비라는 그러한 푸치니를 믿지 못하여 계속 질투의 화신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간의 에피소드에 대하여는 지면이 허락지 않아 모두 소개할수 없거니와 사실 두 사람의 사생활을 소상하게 알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생략코자 한다. 다만, 푸치니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도리아(Doria)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수 없다.
자동차 사고 이후(엘비라의 전남편의 딸 포스카: 앉아 있는 사람) 엘비라(서있는 사람)과 함께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는 푸치니와 같은 고향 마을에 살았던 어떤 농부의 딸이었다. 도리아는 16세 때에 자청하여 푸치니 집에 하녀로 들어왔다. 도리아는 착실하고 온순했다. 그래서 주인 부부인 푸치니와 엘비라에게 정성으로 시중을 들었다. 그런 도리아에 대하여 저 유명한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는 개버릇 남 못 준다는 속담과 마찬가지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엘비라는 도리아와 푸치니가 분명히 썸싱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동네방네 다니면서 도리아가 남편 푸치니를 유혹해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유비통신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집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도리아를 들들 볶기 시작했다. 진실로 엘비라의 질투는 병적이었다. 도리아는 엘비라의 학대와 협박에 견디지 못하여 기어코 다음해 1월,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스스로 음독자살하였다. 푸치니는 ‘내가 도리아를 좋아한 것은 하녀로서 일을 잘해 주었기 때문이며 그 이상은 없었다’고 말하며 애통해 했다. 도리아가 죽은후 그의 시체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 부검되었다. 결과, 도리아는 완전한 처녀였음이 판명되었다. 엘비라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비난의 목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자동차 사고 이후 1904년 수리한 차를 타고 있는 푸치니(왼쪽으로부터 엘비라, 그 옆이 도리아, 앞 쪽은 딸 포스카와 포스카의 딸)
도리아의 가족은 엘비라를 무고죄 및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엘비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재판 결과, 위대한 푸치니 선생의 부인인 엘비라는 징역 5개월 5일과 벌금 7백리라를 선고받았다. 푸치니는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부인인데 징역살이를 하게 놓아 둘수는 없어서 도리아의 아버지와 위자료 1만2천 리라로 합의를 보았다. 푸치니는 이 사건이 끝난 다음 한때 엘비라와 이혼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비라 역시 이 사건으로 많이 뉘우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엘비라를 용서키로 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푸치니의 창작력은 점차 쇠퇴해졌다. 건강도 나빠졌다. 푸치니는 1924년 초에 이르러 목구멍의 통증과 심한 기침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후두암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푸치니는 그해 11월 9일 브뤼셀에서 후두 수술을 받은지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푸치니는 임종의 자리에서 엘비라가 데리고 온 딸 포카스에게 ‘너의 엄마는 정말 멋진 여자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엘비라는 푸치니가 죽은지 6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사족: 엘비라와 푸치니의 생활을 그린 오페라가 있다. ‘마담 푸치니’라는 제목의 오페라이다. 마이클 프라트(Michael Pratt)라는 사람이 작곡했다. 엘비라의 질투를 소재로 한 내용이다. 본 블록의 오페라 추가소개 편에 ‘마담 푸치니’를 소개코자 한다. 작곡자 마이클 프라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음악과 교수이다.
'오페라 이야기 > 오페라 더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든의 잘못된 만남 (0) | 2008.10.03 |
---|---|
누가 나의 괴로움을 알 것인가? - 차이코브스키의 사랑 (0) | 2008.10.02 |
퇴폐음악이라니? (0) | 2008.09.25 |
세편의 토스카가 나올뻔! (0) | 2008.09.25 |
Diva는 인간이 아니다 (0) | 2008.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