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괴로움을 알 것인가? - 차이코브스키의 사랑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차이코브스키의 인생은 영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시베리아에서 태어났다. 제정 러시아가 죄수들을 유배시키는 곳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보트킨스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6남매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지방 국영공장의 공장장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여덟살 때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사했고 다시 생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차이코브스키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법률학교를 나와 법무성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못하여 법무성을 그만두고 생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작곡공부를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거장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의 지도를 받았다. 생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졸업한 차이코브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세운 모스크바음악원에 가서 음악이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으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음악원 교수의 급료라는 것이 몇푼 되지 않았으며 작곡하여 사례로 받는 수입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이코브스키의 생활은 궁색했고 빚만 늘어갔다.
법무성 직원 시절의 차이코브스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의 의뢰로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를 완성한 1876년, 차이코브스키에게는 뜻하지 아니한 후원자가 등장하였다. 나제지다 프라레트브나 폰 메크 부인이었다. 폰 메크(von Meck)부인은 17세에 모스크바의 부유한 철도 경영자인 카를 폰 메크와 결혼하여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6남 6녀의 자녀를 두며 행복한 생활을 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폰 메크 부인은 남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대단한 부호가 되었다. 폰 메크 집안이 얼마나 부유했느냐면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저택 안에 발전 설비를 설치하고 전기 불을 밝힌 집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폰 메크 부인은 남편이 죽자 모스크바의 사교계와 일체 발길을 끊고 집에서 조용히 지내며 독서와 음악 감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12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돌보는 것도 큰 일거리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각지에 영지를 갖고 있어서 간혹 이들 영지에 있는 별장들을 방문하여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음악을 특별히 좋아한 폰 메크 부인은 간혹 모스크바의 작곡가들에게 소품을 의뢰하여 집에서 연주토록 하여 듣는 것을 즐겨했다. 그 중에는 차이코브스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출입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코체크를 통하여 차이코브스키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코체크로부터 차이코브스키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젊고 유망한 작곡가를 진심으로 동정하여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체크는 차이코브스티의 제자였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에게 1년에 약 6천 루블이라는 거금을 연금으로 주고 싶다고 편지로 제안하였다. 차이코브스키가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서 받은 월급이 50루불이었으며 명작 ‘백조의 호수’를 작곡하고 받은 사례비가 8백 루블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1년에 6천 루블은 대단한 금액이 아닐수 없었다. 차이코브스키가 36세의 노총각이던 때였다. 차이코브스키는 당시 3천 루블의 빚을 지고 있었던 때라 폰 메크 부인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폰 메크 부인과 차이코브스키 사이에는 무려 13년간에 걸쳐 편지 교환이 있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주고받은 편지는 1천2백여통에 이른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과 차이코브스키의 관계를 우정으로 볼것인지 또는 애정으로 볼것인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내용이다. 아주 미묘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우선 두 사람은 그렇게 열렬히 편지를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같은 모스크바의 지붕 아래에 살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믄 관계였다. 폰 메크의 저택에서는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었다. 적어도 한번쯤은 차이코브스키를 초청하여 연주회에 참석토록 할만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편지를 살펴보면 반드시 우정의 관계라고는 볼수 없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1877년 3월에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브스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무척 만나고 싶지만 그 만남이 두렵기 때문에 오히려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예요’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서 ‘나의 심정은 그저 멀리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의 음악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또 다른 편지에는 ‘당신으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을 때면 한없이 쓸쓸하여 어찌할줄 모르겠어요. 지금 당신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있을 때의 행복한 기분을 이해해 줄것으로 믿습니다’라고도 썼다. 이 얼마나 플라토닉한 러브인가! 만일 차이코브스키가 열정적으로 대쉬하여 구혼하였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코브스키는 마음속으로만 폰 메크 부인을 사모하였으며 폰 메크 부인도 마음 속으로만 차이코브스키를 흠모하였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매년 6천 루블의 후원금을 받아 생활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받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할수 있었으니 폰 메크 부인이야 말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의 음악을 위해 크게 기여한 인물이 아닐수 없다.
나데즈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
그러는 가운데 차이코브스키에게는 참으로 뜻하지 아니한 사건이 생겼다. 폰 메크 부인과의 우정이 시작된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안토니나 밀류코바라는 여인과의 결혼문제로 인생최대의 위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밀류코바는 모스크바음악원 시절 차이코브스키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뜻하지 아니하게 차이코브스키에게 열렬한 러브레터를 보냈던 것이다. 차이코브스키를 미치도록 존경한다는 내용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에 다녔던 밀류코바라는 여학생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밀류코바가 보낸 편지를 보고 밀류코바의 마음을 대단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보았다. 그래서 밀류코바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답장을 썼다. 실은 그것이 잘못이었다. 오히려 밀류코바의 가슴에 사랑의 불길을 지펴주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밀류코바는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담은 편지를 차이코브스키에게 계속하여 보냈다. 차이코브스키는 당황하였지만 밀류코바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당시 차이코브스키는 오페라 '유진 오네긴'의 작곡에 착수하고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오네긴의 냉정함과 무관심으로 타티아나가 절망중에 사랑의 꿈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밀류코바의 사랑을 거절하면 또 하나의 타티아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괴로워 했다.
결혼 직후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와 함께
밀류코바의 편지는 점점 뜨거워져서 마침내 ‘당신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까지 썼다. 그야말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연애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차이코브스키는 크게 괴로워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그의 괴로움을 폰 메크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만일 내가 이제 와서 밀류코바와의 교제를 끊는다면 나는 그를 큰 불행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나는 두가지 길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한 여인의 파멸로 나 자신의 자유를 얻느냐 아니면 결혼하여 그를 불행에서 건지느냐입니다. 나로서는 결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차이코브스키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차이코브스키와 밀류코바의 결혼식은 1877년 7월 6일 모스크바에서 조용하게 거행되었다. 차이코브스키가 37세, 밀류코바가 28세였다. 차이코브스키는 ‘결혼하여 함께 살다보면 차차 진정한 사랑을 얻을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에 밀류코바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기대나 환상은 얼마 가지 못하여 산산이 깨졌다. 차이코브스키는 결혼한 이후 밀류코바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다. 밀류코바는 예민한 지성의 작곡가인 차이코브스키의 부인으로서는 너무나 지성이 부족했고 저속하였다. 예를 들어 차이코브스키는 빨강이나 노랑과 같은 자극적인 색깔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밀류코바는 차이코브스키의 심정을 일부러 자극하려고 그랬는지 또는 차이코브스키의 기분을 명랑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는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치장을 하여 결국 남편인 차이코브스키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아내의 그러한 행동에 실망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내가 점점 싫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결혼이 실패라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무척 내성적이었던 차이코브스키는 계속 싫어지는 밀류코바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도 자실은 큰 죄악이며 또한 자살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가족들이 충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여 대신 불치의 병에 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점점 추워지는 9월의 어느 날 밤, 강물에 들어가 폐렴에 걸리기를 기다렸으나 하늘의 조화인지 차이코브스키는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다.
밀류코바와의 사사건건 생활에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 차이코브스키는 마침내 10월초 생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는 동생 아나톨리에게 몰래 떠났다. 아나톨리는 형 차이코브스키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당장 정신병의 권위자인 바린스키 박사에게 데리고 갔다. 극심한 노이로제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아나톨리는 심신이 피곤해진 차이코브스키를 데리고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요양을 떠났다. 이로써 차이코브스키와 밀류코바의 결혼생활은 3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혼의 실패가 누구의 탓인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차이코브스키에게도 잘못은 있다. 더구나 차이코브스키는 남에게는 차마 얘기하기 어려운 동성애의 경향이 있었다. 혹자들은 차이코브스키가 마치 동성연애자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런 경향만 있었지 실제로는 동성연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차이코브스키의 성격이 평범하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 할수 있다.
그나저나 밀류코바도 차이코브스키와 마찬가지로 온전치 못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한다. 밀류코바를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병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진 이후에도 밀류코바는 차이코브스키에게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수 없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밀류코바는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난지 몇 년후 정신병원에서 쓸쓸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아무튼 밀류코바 역시 불행한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폰 메크 부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의 모든 불행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계속 후원하였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요양으로 상당히 쾌차해진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작곡에만 전념하여 교향곡 1-5번, 이탈리아 기상곡,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현악 세레나데 등 불후의 걸작들을 내놓았다. 차이코브스키의 교향곡 제4번은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된 곡이다.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연금이 끊어진 것은 1890년부터이다. 차이코브스키가 50세인 해였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에게 집안이 파산지경이 되어서 연금을 보내줄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무렵 차이코브스키는 유럽과 미국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더 이상의 마음으로부터의 편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차이코브스키는 마치 가슴이 텅 빈듯 공허한 심정이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가정이 파산되어 연금을 끊게 된것이 아니라 폰 메크 부인의 장남인 블라디미르가 말할수 없는 정신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폰 메크 부인 자신도 결핵이 악화되어 반미치광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차이코브스키는 그러한 폰 메크 부인측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믿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돈많은 미망인의 일시적인 위안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어 지금까지 10여년 동안 자기가 보냈던 편지를 모두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폰 메크 부인과의 애닲은 사연을 가슴에 묻어둔 차이코브스키는 계속 정진하여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1893년 차이코브스키는 교향곡 제6번 ‘비창’을 마무리하고 그해 10월 28일 생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을 가졌다. 그로부터 5일후, 차이코브스키는 부주의로 수질이 좋지 않은 냉수를 마셔 콜레라에 걸렸다.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순간적이었다. 마침내 11월 6일 오전 3시, 차이코브스키는 53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폰 메크 부인도 마치 차이코브스키의 뒤를 쫓듯 세상을 떠났다.
피터 일리이지 차이코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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