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음악가

하제나우어슈트라쎄의 엠메리히 칼만 기념 명판

정준극 2008. 12. 6. 15:49

 하제나우어슈트라쎄의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alman) 기념 명판

 

 비엔나 오페레타의 백은시대를 장식했던 엠메리히 칼만은 비엔나 하제나우어슈트라쎄(Hasenauerstrasse) 29번지에서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살면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멜로디들을 작곡했다.

 

엠메리히 칼만은 비엔나 오페레타의 백은시대를 장식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는 1882년 헝가리의 시오포크(Siofok)라는 작은 마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53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여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임레 칼만(Imre Kalman)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칼만은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찍이 관절염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칼만은 당시 부다페스트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작곡을 공부하였다. 칼만은 벨라 바르토크와 졸탄 코다이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하였다. 초기에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칼만의 재능은 캬바레 스타일의 유머러스한 노래에 있었다. 칼만은 오페레타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첫 성공작은 타타르야라스(Tatarjaras)였다. 비엔나에서 공연할 때에는 ‘가을 작전’(Ein Herbstmanoever)라고 했고 런던에서 공연할 때에는 ‘유쾌한 경기병’(The Gay Hussars)이라는 제목이었다. 1908년 2월 부다페스트의 루스트슈필극장(Lustpieltheater)에서 공연되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오페레타로 성공한 칼만은 곧 이어 비엔나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칼만은 비엔나에서 ‘마리차 백작부인’(Gräfin Mariza: Countess Maritza), ‘서커스공주’(Die Zirkusprinzessin), ‘집시프리마’(Der Zigeunerprimas: Sari), ‘차르다스의 여왕’(Die Csardasfürstin)등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칼만은 프란츠 레하르와 함께 20세기 초반 비엔나 오페레타의 백은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주역이었다. 칼만의 작품은 비엔나 왈츠와 헝가리의 차르다스를 융합한 것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푸치니의 멜로디와 같은 면모도 포함되어 있고 차이코브스키와 같은 교향적 면모도 담겨 있다. 실제로 칼만은 열렬한 푸치니 추종자였다. 칼만은 비록 유태계였지만 히틀러는 그의 작품을 무척 애호하였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히틀러는 칼만에게 ‘명예 아리안’ 민족으로 삼겠다고 제안했지만 칼만은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칼만은 비엔나에서 추방을 당하여 파리로 갔다가 나중에는 미국으로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다. 칼만이 미국으로 이민가자마자 나치는 칼만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즉각 금지하였다. 칼만은 전쟁이 끝난후인 1949년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후 1951년 파리로 가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칼만은 약 20편의 오페레타를 남겼다.

 

엠메리히 칼만(헝가리에서는 임레 칼만이라고 부름)의 기념상은 그가 음악공부를 했던 부다페스트 음악원 앞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