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음악가

슈타트파르크의 안톤 브루크너 기념상

정준극 2008. 12. 17. 11:25

슈타트파르크의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기념상

 

슈타트파르크의 안톤 브루크너 기념상

 

비엔나에서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의 기념상은 슈타트파르크에 있다. 브루크너의 또 다른 기념상은 비엔나대학교 본관건물에 있다.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 브루크너의 기념상을 슈타트파르크에 설립한 것은 비엔나 시민들로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브르크너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미사곡과 모테트도 상당히 남겼다. 하지만 역시 브르크너라고 하면 교향곡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오스트리아-독일 낭만주의를 마지막 장식하는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풍부한 하모니를 지닌 음악언어, 다성적인 복잡성, 그리고 대부분 오스트리아-독일 작곡가들의 교향곡이 그렇듯 상당히 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생가가 있는 안스펠덴의 브루크너 기념상


안톤 브루크너는 1824년 상부 오스트리아의 안스펠덴(Ansfelde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학교 교장 겸 교회의 오르간연주자였다. 안스펠덴은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나중에 안톤 브루크너로 인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안톤의 첫 번째 음악선생은 그의 아버지였다. 안톤은 몇해동안 시골학교에서 아버지를 도와 음악수업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저녁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마을 주점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생활했다. 안톤이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은 곳은 린츠(Linz)의 성플로리안(St Florian)수도원에서였다. 대기만성이라고 했던가? 안톤은 40세가 되도록 성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음악공부를 하며 무명의 오르간주자로 활동했다.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적 천재성은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토 키츨러(Otto Kitzler)라는 사람에게서 작곡을 배우면서 비로소 대작곡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에 비하면 사정이 달랐다.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안톤 브루크너 기념상 오리지널. 전쟁으로 파손되어 뮤즈의 조각은 사라졌다. 오른쪽은 현재의 기념상.


브루크너는 수십년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서 그런지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하지만 맥주 마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이점은 프란츠 리스트와 비슷했다. 리스트도 독실한 가톨릭이면서 맥주를 무척 좋아했다. 브루크너와 리스트는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었다. 브루크너는 리스트, 바그너와 함께 신독일학파를 주도하였다. 브루크너는 오르간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오르간주자로서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갈채를 받았다. 영국에서는 로열 알버트 홀에 새로 설치한 헨리 윌리스(Henry Willis)오르간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구스타프 말러는 브루크너를 선배로서 존경하였으며 브루크너의 오르간강좌에소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브루크너는 1896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린츠에 있는 성플로리안 수도원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그가 사랑하던 오르간이 있는 장소의 바로 아래쪽이었다. 1932년, 린츠에는 브루크너를 기념하여 ‘안톤 브루크너 음악, 연극, 무용 사립대학교’(Anton Bruckner Private University for Music, Drama, and Dance)가 설립되었다. 이 대학교는 2004년까지 ‘린츠 브루크너 음악원’(Bruckner Conservatory Linz)라는 이름이었다. 린츠의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도 그를 기념하여 생긴 단체이다.

 

 안톤 브루크너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