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칼 필립 공자 기마상

정준극 2008. 12. 16. 19:22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칼 필립(Karl Philipp) 공자 기마상

나폴레옹을 격퇴한 명장 슈봐르첸버그 장군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미상. 뒤편에 러시아 적군(赤軍)기념상과 분수가 있다. 그 뒤편에 있는 건물들은 슈봐르첸버그 궁전이다. 현재 궁전의 일부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옛 보헤미아에 있던 슈봐르첸버그의 영주인 칼 필립(Karl Philipp: Charles Philip: 1771-1820)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오스트리아의 장군(원수)이다. 보통 슈봐르첸버그 장군으로 알려진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헌신적인 기여로 근대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비엔나 시내의 캐른트너링과 슈베르트링 사이에 있는 슈봐르첸버그플라츠(Schwarzenbegplatz)는 그를 기념하여 붙인 명칭이다. 이 광장의 한 가운데에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기미상이 우뚝 서 있다.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기마상 바로 뒤편에는 2차 대전후 러시아 점령군이 세운 러시아적군(赤軍) 기념상이 높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비엔나 시가 조성한 분수(Hochstralbrunnen)가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

 

슈봐르첸버그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칼 필립은 1771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의 또 다른 영웅인 샤를르(칼) 대공도 1771년에 태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이다. 칼 필립의 아버지는 슈봐르첸버그의 영주인 요한 네포무크 안톤(Johann Nepomuk Anton)이며 어머니는 외팅겐-봘러슈타인(Öttingen-Wallerstein)의 백작부인인 마리 엘레오노레(Marie Eleonore)였다. 칼 필립은 17세 때에 제국의 경기병부대에 입대하여 이듬해부터는 터키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등 젊은 장교로서 용감성을 크게 떨쳤다. 칼 필립은 22세가 되던 1793년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연대의 선봉에 서서 프랑스 진영에 돌격하여 프랑스 진영을 교란하였으며 이로서 오스트리아군이 대승을 거두도록 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천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칼 필립은 마리아 테레자 훈장을 받았다. 칼 필립의 용맹함은 당시 유럽의 화제꺼리였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칼 필립 공자 기마상

                          

그후에도 칼 필립은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1796년에는 장군으로 승진하였고 1799년에는 마침내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800년의 호엔린덴(Hohenlinden)전투에서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군을 용감하게 구원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인 샤를르(칼) 대공은 칼 필립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그를 후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군대와의 전투에서도 칼 필립은 일단의 경기병과 함께 적진에 돌격하여 나폴레옹군을 큰 혼란에 빠트리게 했다. 이로서 그는 또 다시 마리아 테레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황금 양털’(Gloden Fleece) 기사에 임명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코자 동진을 추진할 때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연합을 위해 칼 필립을 사절단장으로 하여 러시아에 파견했다. 이미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던 칼 필립은 러시아 황실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으며 러이사와의 동맹은 쉽게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그는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의 군대와 봐그람(Wagram)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일 때 또 다시 선봉에 나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칼 필립 공자 기마상과 카지노 건물


그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에 동맹을 위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칼 필립은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제(Marie Louise)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대표단장으로 선정되어 파리를 방문하였다. 결혼을 성사시키고 파리에서 돌아온 칼 필립은 비엔나에서 나폴레옹의 신부가 될 마리 루이제를 위하여 무도회를 주최하였다. 그러나 무도회는 뜻하지 아니한 화재로 여러 사람이 죽는 재앙을 가져왔다. 칼 필립의 동생의 부인도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슈봐르첸버그 공자인 칼 필립을 개인적으로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래서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에 칼 필립이 동맹군으로서 참가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을 맡도록 특별히 요청하기까지 했다. 칼 필립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후속부대로서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므로 칼 필립은 교묘한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이 명목상의 동맹군 역할만 하도록 했다. 1813년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되자 칼 필립은 육군대원수로 승진하여 오스트리아군과 보헤미아 연합군을 지휘하였다. 칼 필립은 나폴레옹군과의 1813-14년 전투에서 승리하여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을 실각시키는데 큰 역할을 맡아했다. 이후 칼 필립은 오스트리아로부터는 물론 다른 나라로부터 수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황실의 문장을 사용할수 있도록 허용 받은 것 등이다. 

 

슈봐르첸버그의 칼 필립 공자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후 칼 필립은 사랑하는 여동생 카롤리네(Caroline)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여 와병하던중 1820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하였을 때 심장마비가 일어나 세상을 떠났다. 슈봐르첸버그는 보헤미아의 몰다우강변에 있는 체스키 크룸로브(Cesky Krumlov)지방을 말한다. 훗날 에곤 쉴레가 17세의 소녀 봘리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던 곳이다. 칼 필립은 세 아들을 두었다. 모두 군인이었다. 큰 아들 프리드리히는 모험심이 많은 군인으로서 문학작품에도 등장할 정도로 여러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였다. 둘째 아들 칼 필립 2세는 오스트리아군의 병참사령관이었고 셋째 아들 에드문트 레오폴드 프리드리히는 육군원수였다. 현재 슈봐르첸베르크 가문의 수장은 카렐 7세(Karel VII)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스위스에 망명하여 지내다가 구소련이 와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공화국과 슬로베니아로 독립하자 귀국하여 상원의원으로서 체코공화국의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생인 요셉 슈트라우스는 슈봐르첸버그 장군을 기념하여 'Schwarzenberg Monument-Marsch'를 작곡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