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알베르티나의 알브레헤트 대공 기마상

정준극 2008. 12. 16. 19:26

알베르티나의 알브레헤트(Albrecht) 대공 기마상

 

알베르티나의 알브레헤트 대공 기마상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뒤편 알베르티나(Albertina)미술관의 테라스에 서 있는 기마상이 테센공작(Herzog von Teschen) 알브레헤트 대공(Erzherzog Albrecht)이다. 알브레헤트(영어로는 Albert) 대공은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 우뚝 서 있는 기마상인 샤를르(칼) 대공의 장남이다. 부르크가르텐(Burggarten)에 있는 기마상인 프란시스1세는 샤를르(칼) 대공의 친형으로 알브레헤트 대공에게는 삼촌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아버지 샤를르(칼) 대공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육군중장(Feldmarschall-leutnant)으로서 36년간 군총감독관(Oberkommadier: Inspector General)을 역임하며 세기 말에 제국의 군대를 근대화하는데 기여하였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알베르티나는 알브레헤트장군 가족의 겨울궁전이었다. 알베르티나의 예전 명칭은 팔레 에르츠헤르초그 알브레헤트(Palais Erzherzog Albrecht)였다. 알브레헤트 대공의 기마상은 바로 이 궁전의 앞 테라스에 세워져 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전경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들의 이름이 그렇듯이 알브레헤트 대공의 풀 네임도 상당히 길다. 알브레헤트 프리드리히 루돌프 도미니크(Albrecht Friedrich Rodulf Dominik)이다. 1817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895년 예전엔 트렌티노(Trentino)라고 불리던 티롤 지방의 아르코(Arco)라는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테센공작이라는 작위는 아버지 칼(샤를르) 대공의 작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테센공국(Duchy of Teschen)은 오늘날 폴란드와  체코공화국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속하기도 했다. 폴란드에서는 테센을 치에친(Cieszyn)이라고 불렀고 보헤미아(체코공화국)에서는 체스키 테신(Cesky Tesin)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제국의 영토내에 수많은 공국이 있었으며 이들 공국들은 비록 제국에 속하여 있지만 독립적인 운영을 하였다. 테센은 상부 실레지아에 있던 여러 공국 중의 하나로서 대대로 합스부르크의 칼(샤를르) 대공 집안이 통치하였다.


알브레헤트의 아버지 칼(샤를르) 대공은 아슈페른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친 국가적 영웅으로 레오폴드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의 둘째 아들이다. 알브레헤트의  어머니는 나싸우-봐일부르크(Nassau-Weilburg) 공국의 공주이다. 알브레헤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군사교육을 받아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알브레헤트는 간질병 증세가 있었다. 아버지인 칼(샤를르) 대공도 간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알브레헤트의 증세는 아버지에 비하여 가벼웠다. 비록 알브레헤트에게 간질병 증세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군사업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알브레헤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군대에 정식으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처음 복무는 유명한 요셉 라데츠키(Joseph Radetzky) 백작의 휘하에서였다. 어릴때부터 군인으로서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알브레헤트는 능력을 인정받아(그리고 황족이라는 배경으로) 23세 때에 육군소장으로 승진되었으며 26세 때에는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다니비우스와 빈도보나 조각분수

 

 

알브레헤트는 1844년, 26세 때에 바바리아(바이에른)의 힐데가르트(Hildegard: 1825-1864) 공주와 결혼하였다. 힐데가르트는 바바리아공국의 루드비히1세 국왕의 딸이었다. 두 사람사이에는 1남 2녀를 두었다. 그런데 아들 칼(Karl)은 두 살도 넘기지 못하고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칼은 아버지 알브레헤트와 함께 합스부르크의 제국영묘(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둘째 딸인 마텔데(Mathilde)는 미혼으로서 18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시 제국영묘에 안치되었다. 마틸데의 죽음은 끔찍한 재난이었다. 마틸데는 바바리아의 헤첸도르프(Hetzendorf)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프란츠 요셉 황제와 결혼하여 제국의 왕비가 된 엘리자베트(씨씨)가 살았던 저택이었다. 1867년 6월 어느날 저녁, 마틸데는 극장에 가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그때 아버지인 알브레헤트 대공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알브레헤트 대공은 어린 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여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들어오자 마틸데는 피우던 담배를 뒤로 숨겼는데 그만 가벼운 인화물질로 된 옷에 담뱃불이 붙어 순식간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끔찍한 화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하여 알브레헤트 대공은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았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오른쪽) 인근. 그 옆이 슈타츠오퍼.

 

1847년 아버지 칼(샤를르) 대공이 세상을 떠나자 알브레헤트는 비엔나 근교 바덴(Baden)에 있는 팔레 봐일부르크(Palais Weilburg)를 상속받아 가족들과 함께 지냈으며 겨울에는 앞에서 말한대로 비엔나 중심지의 알브레레트 대공궁전(현재의 알베르티나)에서 지냈다. 1848년, 비엔나에는 혁명의 기운이 팽배하였다. 시가지에서는 공화제를 원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과격한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알브레헤트 장군은 1848년 3월 어느날 비엔나에서 혁명분자들의 시위에 휩쓸려 다투다가 부상을 입었다. 황제는 알브레헤트를 비엔나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라데츠키 장군의 휘하로 보냈다. 라데츠키 장군은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알버트(Charles Albert)왕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와의 연립을 추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해야할 입장이었다. 라데츠키 장군 휘하의 알브레헤트는 탁월한 전략전술로서 1849년 3월 23일의 노바라(Novara)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한 공적으로 2년후인 1851년에는 헝가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알브레헤트의 부인인 힐데가르트 공주는 1864년 3월, 친정오빠인 막시밀리안2세 바바리아 국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뮌헨에 갔다가 폐렴에 늑막염이 겹쳐 즉시 비엔나로 돌아왔으나 한달도 못되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브레헤트는 헝가리 총독을 사임하고 비엔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바이에른의 힐데가르트 공주


1866년 6월에 이른바 ‘7주 전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빅토로 엠마누엘레 2세가 오스트리아제국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제국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을 거의 모두 통치하고 있었다. 알브레헤트는 남부지역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의 진격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알브레헤트는 6월 24일의 쿠스토짜(Custozza)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독립주의자인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가 제국의 영토인 보헤미아를 침략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알브레헤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불려와 보헤미아 전선을 담당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프러시아도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러시아 및 이탈리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전면전의 위기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평화협정의 결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Holstein)을 프러시아, 베네치아(Venice)를 이탈리아에 양보하였다. 그리고 1867년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같은 제국 안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통치권을 가지는 이상한 형태의 제국으로 변모하였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입구의 피아커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으로 변모한후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스트리아만이라도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육군총사령관(Oberkommandier)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알브레헤트 대공은 총사령관직을 내놓고 총감독관(Generalinspekteur)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알브레헤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감독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총감독관의 직책을 맡은 알브레헤트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군대를 개혁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철도를 확장하여 병력의 이동을 신속하게 했으며 최신 무기를 도입하였고 병사들의 복무기간을 단축하여 사기를 진작하였다. 이와 함께 웬만한 군수물자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생산토록 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부상할수 있었다. 하지만 루돌프 황태자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알브레헤트의 강군(强軍) 정책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루돌프 황태자는 헝가리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은근히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루돌프 황태자는 1888년 알브레헤트를 육군원수로 임명하고 알브레헤트의 직책인 총감독관 자리는 ‘보병총감독관’(Generalinspekteur der Infanterie)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황태자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황태자는 제국군대의 자유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프란츠 요셉 황제의 대신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황태자는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마 이러한 실망도 1889년 1월 30일 황태가자 마이엘링(Mayerling)에서 자살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알브레헤트는 비록 루돌프 황태자가 다른 사람을 총감독관으로 임명하였지만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이후 다시 총감독관의 자리를 맡아 18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군무에 충실하였다. 알브레헤트는 카푸친교회 지하에 있는 제국영묘(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알브레헤트 대공


알브레헤트 대공은 합스부르크 가문 중에서도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다. 헝가리에 1,200 평방 Km에 이르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값으로 따질수 없는 수많은 귀중한 예술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판화와 소묘 콜렉션은 유럽 최대였다. 예를 들면 알브레헤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다. 이 작품들은 나중에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자선사업을 펼쳤다. 그래서 ‘천사의 마음’(Engelsherz)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의 좌우명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된다'(Geben ist seliger denn Nehmen)였다.

 

 알브레헤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우리나라에서 개신교 성경의 표지로 많이 사용하던 그림이다.